관극일지 프롤로그
내가 팬레터 총 마지막 공연(총 막공)을 보러 3월 20일 밤에 공연을 보러 가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부모님은 그럼 세 번이나 보는 건데 왜 똑같은 공연을 또 보냐고 이야기하셨다. 물론 사실 그 공연은 8번째 공연이었고 우리 부모님은 모르셨지만 나는 치밀하게 주말의 계획을 세웠다. 부모님은 금요일부터 집을 비우셨고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실 계획이셨다. 그래서 알리바이를 위해 일요일 밤 공연은 막공이라 보고 싶다고 미리 허가를 구해두었고, 주말 동안 청소를 해야 했던 나는 토요일 일어나 청소기를 돌리고 낮, 밤 연속으로 공연을 보는 일명 종일반을 돌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할 일을 좀 한 후에 일요일 아침 물걸레질을 다 해두고 다시 종일반을 갔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내가 한 번만 본 줄 아셨겠지...^^ 정말 피곤한 주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 전날 금요일 공연도 봤을 것이다. 내가 못 본 배우들의 페어가 또 궁금해지다니...
공연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같은 공연을 여러 번 보는 경우도 많아졌다. 일명 회전극을 도는 회전러인셈이다. '한번 보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공연을 보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입장을 가지고 간다. 100% 동일한 공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 배우의 목 상태나 보는 관객의 컨디션에 따른 문제가 아니다. 각각의 배우들이 가지고 오는 그 호흡과 디테일이 다름에서 오는 강렬한 차이점이 생긴다. 드라마나 영화는 한 명의 배우가 하나의 역할을 연구하여 자신만의 서사와 디테일들을 구축해온다. 반면 원캐스트, 한 명이 하나의 역할을 하는 극이 아닌 이상 최소 두 명의 배우들이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 각각의 배우들이 가지고 오는 서사의 깊이와 방향성이 완전히 달라지고 이에 따라 그 극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그 배우들이 각각 어떤 배우들로 구성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극을 보게 되는 것이다.
작년 헤드윅의 경우 조승우 배우님의 헤드윅은 다른 헤드윅들에 비해 1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 감정들이 많이 덜어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배우님이 가지고 있는 그 캐릭터 해석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드윅과 이츠학의 관계성 역시 달라졌다. 또 뮤지컬 팬레터도 그랬다. 이규형 배우님이 연기하는 해진 선생님은 글에 대한 집착 그 자체로 쓰러져있는 와중에도 손은 끊임없이 글을 쓴다. 반면 글보다는 히카루 그 자체에 집중하는 선생님도 있다. 윤나무 배우님의 해진 선생님은 정말 극 내향인으로 처음 세훈이와 인사를 할 때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를 한다, 반면 좀 더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선생님도 있다. 히카루를 연기한 세명의 배우들 역시 그 결을 완전히 달리한다. 특히 그 존재의 탄생 이유에 따라 생의 반려 직전의 동작이 완전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강혜인 배우님의 히카루는 글에 대한 집착으로 세훈이는 신경도 안 쓰고 해진 선생님이 죽든 말든 원고를 두고 숨는다. 반면 소정화 배우님의 히카루는 보다 세훈이에 대한 애정이 우선이라 세훈이가 원고를 넘기고 가면 상처받은 표정과 함께 원고를 후드득 떨어트리며 숨는다. 이게 어떻게 같은 극을 보는 것이라고 이야길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각각의 노선의 배우들이 어떤 배우를 만나느냐에 따라서도 완전히 다른 극이 된다. 팬레터의 경우 글+글+글 페어의 느낌과 히카루+글+글 페어의 느낌은 또 다르다. 그래서 관객들은 흔히 회전러가 된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는 별로였을 수도 있지만 다른 페어로 보면 감상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반복적으로 같은 극을 보게 된다. 물론 극에 대한 애정 혹은 배우에 대한 애정이 기반으로 존재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는 이 극은 내일 똑같은 배우로 보더라도 다시 오지 않을 우연의 향연들이니. 하다못해 사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소품의 차이 혹은 그것이 사고라 할지라도 그 극은 내일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회전을 돈다. 오늘은 또 어떤 우연이 나를 즐거운 대레전의 길로 이끌어줄지 가슴 부푼 설렘을 안고 말이다. 다른 후기들을 보며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디테일들을 그리고 새로운 과점에서의 해석을 파악하고, 오늘은 또 다른 무대를 볼 수 있기를, 아쉬웠던 혹은 해소하지 못한 나의 궁금증을 해소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안고 말이다. 때때로 나의 두 번째 혹은 n번째 관극이 거듭될수록 실망하거나 나의 기대를 채우지 못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약간의 기대를 안고 다시 한번 공연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심지어 잔혹하디 잔혹한 연극과 뮤지컬의 세계에서 돌려 볼 수 있는 매체 흔히 말하는 박제는 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극이 혹은 그 배우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정말 마트에서나 다시는 들을법한 돌아오지 않을 기회인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섣불리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앞으로 써 나갈 관극일지에서는 어떤 극은 여러 번 보기도, 어떤 극은 한 번만 보기도 했을 것이며 어떤 극은 오로지 중계로만 본 극도 있다. 내가 보고 느낀 감상은 단순히 내가 본 날의 감상이지 모든 극의 감상이 될 수는 없으리라. 때때로 배우들의 디테일에 대한 비교들이 등장할 수 있겠으나 극을 보며 했던 나의 다양한 생각들을 정리해두는 느낌으로 접근해보려 한다. 배우들의 디테일에 접근하기보다 그 극 자체를 보며 했던 다양한 생각들의 방향들을 잘 갈무리하여 앞으로 같은 극을 볼, 혹은 지난 극을 그리워하는 또 다른 관객과 나 자신에게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주길 바란다.
이 세상에 같은 관극은 그리고 나쁜 관극은 없다!
다만 본 사람과 못 본 사람만이 있으며 날로 꺼져가는 내 통장만이 있을 뿐.
그러나 갈까 말까 할 때는 가자 또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나에게 언제 그 티켓이 쥐어질지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