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와 노트

매일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by 서주운

만년필의 삼위일체를 완성하는 것은 종이다.


만년필을 사용하기 전에는 다이어리나 노트를 고를 때 한 번도 종이의 품질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연필과 볼펜은 대부분의 종이에 쓸 수 있는 훌륭한 필기구였던 것이다. 만년필은 그렇지 않다. 만년필을 사용하려면 종이를 가려야 한다. 종이의 질이 좋지 않고 적절한 코팅이 되어 있지 않을 경우 종이가 잉크를 하염없이 빨아들여서 글자가 아주 두꺼워지거나 종이의 섬유질을 따라 잉크가 스며들어버리는 일명 거미줄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꼭 만년필용 종이라고 제작사에서 명시하지 않은 종이라도 만년필을 쓸 수 있는 품질 좋은 종이도 많이 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위와 같은 일을 겪으면 다음부터는 꼭 종이나 노트를 살 때 만년필을 쓸 수 있는지부터 확인하게 된다.


종이의 색, 품질, 두께, 코팅의 정도에 따라서 잉크의 발색도 차이가 난다. 큰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미묘한 차이인데도 이런 차이를 크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잉크로 스케치를 하거나 캘리그래피를 하지는 않기 때문에 발색 차이가 있어도 그냥 있구나 생각하는 수준이고 꼭 마음에 드는 종이를 찾아서 써야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품질 좋고 저렴한 종이가 좋다. 만년필을 쓸 수만 있다면 종이의 종류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는 노트의 크기와 제본 방식을 조금 더 까다롭게 따지는 것 같다. 이런저런 기록을 시작하면서 각각을 어떤 노트에 기록하면 좋을지 정하려고 여러 노트를 써 보면서 호불호가 확고해진 것 같다.


노트의 크기는 A5(148×210 mm)와 B5(182×257 mm)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항상 휴대가 가능하면서 적당량의 필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크기가 A5이고 항상 가지고 다니기는 어렵지만 가끔은 가지고 다닐만하고 필기량이 많을 때 좋은 사이즈가 B5라고 생각한다. 용도에 따라 둘 중 한 가지를 골라서 쓴다. 나의 기록을 담은 같은 크기의 노트를 주욱 꽂아두고 싶어서 되도록 같은 크기의 노트를 골라서 한 권 한 권 기록을 쌓고 있다. 카페나 여행지에서 글을 쓰는 일이 많아지면서 노트를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무거운 가죽 커버를 피하게 되었고 소프트 커버도 부담스러워졌다. 조금이라도 무거우면 아무래도 들고나가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 자연스럽게 휴대성이 뛰어난 얇은 종이 표지를 선호하게 되었다. 가격 면에서도 좋은 것은 덤. 노트의 두께도 100쪽이 넘어가면 너무 두껍고 무거운 것 같아서 100쪽이 넘지 않는 노트를 주로 사용한다.


노트의 제본 방식은 사철 제본을 선호한다. 출판물의 제본 방식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노트를 알아보면서 제본 방식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게 생겼다. 사철 제본은 책등을 실로 꿰매어 철한 것으로 튼튼하고 180도로 펼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하지만 가격은 가장 비싼 편이다. 중철 제본은 반으로 접은 종이의 접힌 부분을 철침으로 고정한 것으로 내구성은 떨어지지만 가격이 저렴하다. 무선철 제본은 실이나 철침을 쓰지 않고 책등을 풀로 굳힌 것으로 접착제의 성능이 좋지 않았던 예전에는 내구성이 좋지 않은 제본 방식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접착제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가격도 저렴하고 내구성도 좋은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단점은 활짝 펼칠 수 없다는 것. 스파이럴 링이나 더블 링을 사용한 스프링 제본은 종이가 완전히 낱장으로 분리되어 있고 스프링의 종류에 따라서는 열어서 종이의 순서를 바꿔 끼울 수도 있다. 단점은 스프링이 노트보다 튀어나와 있어 불편할 수 있다는 점. 떡 제본은 무선철 제본과 비슷하게 풀로 굳힌 것이지만 종이 묶음이 아닌 낱장의 종이들을 모아 한 면을 굳힌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내구성이 좋지 않아 종이가 낱장으로 뜯어질 수가 있는데 이 점을 역이용해서 한 장씩 뜯어서 쓸 수 있는 메모지 묶음을 제작할 때 활용하기도 한다.


떡 제본은 내구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시중에 판매하는 노트 중 떡 제본을 적용한 노트는 거의 없다. 스프링 제본 노트는 학창 시절에는 쓰기도 했는데 이제는 책장에 꽂아둘 때 최악이라는 점에서 절대 사지 않는다. 남은 것이 무선철, 중철, 사철인데 이 중 사철 제본 노트가 가장 비싸다. 제본 방식을 공부한 뒤 처음으로 노트를 구매할 때 사철 제본이 얼마나 좋길래 혼자 비싼 걸까 생각했고 나는 무선철이나 중철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나 정도는 써볼까 싶어서 구매한 사철 제본 노트 하나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는 엄청난 반전. 역시 사람은 경험을 해 봐야 한다. 이제는 노트를 찾아볼 때 사철 제본인지를 가장 먼저 확인한다.


종이 이야기보다 제본 방식 이야기를 더 길게 한 것 같다. 아직 나는 종이 자체의 섬세한 차이는 크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언젠가는 나도 그런 작은 차이들을 민감하게 구분하고 꼭 이 종이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날이 올지 궁금하다.


와쿠이 요시유미 · 와쿠이 사다미, 『문구의 과학: 일상의 공부 도구에 숨겨진 비상한 작동 원리』, 최혜리 옮김, 도서출판 유유,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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