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걸음 앞서가는 사람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

by 서주운

중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미혼인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수업 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잘 가르쳐주시고 학생들에게 다정한 관심도 많이 쏟아주신 분이었다. 나는 선생님 말씀이라도 부당하다고 생각한 말은 잘 따르지 않던 반항아 기질이 있는 아이였지만, 국어 선생님은 참 좋아했고 잘 따랐다.


선생님은 키는 보통이었지만 건강하신 걸까 싶을 정도로 마른 편이라 호리호리한 분이었다. 얼굴이 작고 목이 길었다. 알이 커다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이 사슴처럼 컸다. 코는 작고 입술은 얇지만 입은 커서 웃으실 때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웃으셨지만 크고 환하게 웃으셨다는 인상이 남았다. 곧은 앞머리는 이마를 다 가렸고, 컬이 작은 긴 곱슬머리를 한쪽으로 묶고 다니셨다. 묶은 머리끝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다. 항상 치마를 입으셨지만 수수하고 차분한 옷이었다. 옷차림 때문이었을까 인상에 남는 헤어스타일 때문이었을까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던 표정 때문이었을까 어딘가 소녀 같은 부분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내가 반장이 됐을 때 선생님이 나를 따로 교무실에 불렀다. 교무실 구석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반장이란 무리로부터 열 걸음 정도 앞서 걷는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반장은 친구들보다 앞서 걸어야 하지만 너무 많이 앞서 걸어서도 안 된다고 하셨다. 친구들이 나를 보고 따라올 수 있을 만큼, 열 걸음 정도만 앞서 걸으라고 하셨다. 사실 당시 반장이 할 일은 ‘차렷, 선생님께 경례’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이 와닿은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해 주신 말씀은 오히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살면서 종종 떠올랐다.


회사에서 처음으로 파트 리더를 맡았을 때, 앞서 걸어야 한다는 말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전임 파트 리더가 갑자기 퇴사하면서 리더 욕심은 조금도 없던 내가 파트를 이끌게 되었다. 갑자기 맡은 리더라는 자리가 버거웠지만, 파트원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 걷기 위해 노력했다. 나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른 파트원들과 비슷한 속도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같은 속도로 걷던 사람들보다 열 걸음 앞서 걷기 위해 가속도를 내야 했다. 가장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했고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맡아서 했다. 내가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실험이라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여건 상 실험을 더 많이 할 수 없다면 파트원들 한 명 한 명 불만은 없는지 지쳐가는 것은 아닌지 파악하고 신경 써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가 바뀌고 파트가 사라져 파트 리더에서 다시 파트원이 될 때까지 항상 한 걸음이라도 앞서고 있는 것이 맞을까 걱정하며 보낸 나날이었다.


반대로 내가 열 걸음 넘게 앞서 걷고 있는 것은 아닐지 돌아보는 일도 있었다. 회사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에서 든 생각이다. 나는 리더는 아니지만 이 모임에서 가장 진지하게 글쓰기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모임에 참여하기 몇 년 전부터 나는 전업 작가를 꿈꾸며 글을 쓰고 있다. 당장 이루어질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할 꿈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럼에도 진심으로 도전하기로 한 꿈이다. 줄곧 혼자서 분투하며 전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글을 써 왔다. 글쓰기 모임을 만났을 때 돌파구를 발견한 것 같았고 재미있고 행복했다. 우리 글쓰기 모임은 3년 전 회사 교육 프로그램으로 시작했지만, 작년에 회사로부터 독립해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모임으로 계속하자고 마음을 모았다. 나는 이때 우리 모임에는 글쓰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만 남았다고 생각했고 같이 글쓰기 공부를 하며 글을 쓰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무작정 글을 쓰기보다는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토론해 보고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생각해 보고 그런 글을 쓰려면 어떤 훈련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글을 써보고 싶었다. 혼자 하기보다는 같이 하고 싶었다. 내 제안에 반대한 사람은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제안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취미인 것이다. 우리 모임 규칙인 한 주에 한 편 글을 써서 올리는 일만으로도 그들은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혼자만 앞서 걸으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함께 공부하자는 말은 철회하지 않고 혼자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서 공유하고 있다. 종종 외롭다. 분명 함께인데 나 혼자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모임 사람들과 같이 글을 쓰고 싶다. 함께 하고 싶기에 열 걸음 넘게 앞서 걷지 않도록 노력 중이다.


열 걸음 앞서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 잊고 있다가도 꼭 필요한 순간이면 마법처럼 생각나는 말이다. 선생님도 당시 내가 선생님의 조언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 것 같다. 그럼에도 나중을 위해 미리 해주신 말 아니었을까. 살면서 꼭 필요할 때 꺼내보라고 선물처럼 주신 문장 아니었을까.

금요일 연재
이전 01화이야기를 시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