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와 수건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

by 서주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젊은 남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ROTC 출신이었는데 군대에서 복무할 때 겪으셨던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다. 이전에는 군대 이야기를 들을 일이 거의 없었다. ROTC(Reserved Officers’ Training Corps)라는 것도 처음 들어봤다. ROTC의 정식 명칭은 학군사관후보생인데, 재학 중 군사 교육을 받고 졸업 후 장교 계급인 소위로 임관할 수 있는 병역 과정이다.


군대 이야기라면 지루할 것 같지만 선생님이 해주시는 군대 이야기는 지루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 친구들은 수업이 듣기 싫어지면 선생님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며 샛길로 빠질 궁리를 했다. 이런 꼼수는 칼같이 거절하던 선생님이었지만 군대 이야기를 해 달라는 수법에는 번번이 빠져서 수업을 제쳐두고 한참이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도 대부분 심심풀이 땅콩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는지 전부 다 잊어버렸는데, 아직 기억에 남아있는 이야기가 딱 하나 있다. 홍시와 수건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시작은 언제나처럼 위풍당당했다. "선생님이 말이다, 선생님이 되기 전에는 장교지 않았냐. 너희 장교가 어떤지 모르지? 그때는 뭐, 내가 세수만 하고 있어도 옆에 이등병이 두 명이나 서 있었어. 한 명은 수건을 팔에 따악 걸치고 있고 한 명은 치약까지 짜 놓은 칫솔을 들고 있는 거야. 어떠냐, 대단하지? 그렇게 지내다가 교원 임용고시에 딱 합격을 했는데 첫 발령지가 쩌기 시골에 있는 무진장 작은 학교였단 말이지. 제대하고 그 시골에 가서 쪼마난 집에서 혼자 밥하고 빨래하는데 서럽지 않겠냐. 장교 때는 어마어마했는데 갑자기 이러고 살려니깐. 밤마다 다시 군대로 돌아갈지 만날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날이 왔지. 소풍 날. 시골이니까 어디 소풍으로 갈 데가 있냐. 동물원도 없지, 공원도 없지, 그냥 산 밖에 갈 데가 없는 거야. 산에 올라가서 대충 자리 잡고 점심을 먹으려고 딱 앉았는데, 학생 하나가 나한테 오더니 뭘 쑥 내밀어. 홍시였어. 바알간 홍시. 내가 그때 받은 그 홍시 때문에 이때껏 군대 안 돌아가고 선생하고 있는 거야." 이야기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선생님은 남은 수업 시간을 확인하며 허둥지둥 수업을 이어가셨다.


어른이 되어 돌이켜보니 선생님은 그 감을 먹으며 어떻게 눈물을 참았는지 모르겠다. 홍시는 깨지기 쉬운 음식이다. 잘 익은 감은 조금만 흔들려도 깨지고 흐트러진다. 시골에서 소풍으로 간 산이라면 제법 오르락내리락했을 것이다. 그런 길을 걷는 내내 깨지지 않게 조심조심 들고 온 것이다. 선생님께 드리려고. 선생님 드시라고 달디단 홍시를 집에서부터 챙겨 온 것이다.


살다 보면 내가 세수하고 있을 때 누군가 옆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려주는 삶을 선택하고 싶을 때가 있다. 옳고 그름은 없겠지만 나도 선생님처럼 수건이 아닌 홍시를 선택하고 싶다. 궁상맞은 삶이라도 진심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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