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6’과 ‘주4.5일’의 기묘한 간극

by TJ

실리콘밸리의 밤은 여전히 환하게 켜져 있다. 인공지능(AI)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기업들은 앞다투어 사람을 더 오래, 더 강하게 붙잡아 두려 하고 있다. ‘996’이라 불리는 근무 문화, 즉 오전 9시에 출근해 밤 9시에 퇴근하고 주 6일을 일하는 방식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거대 IT기업들이 먼저 이를 체화했고, 최근에는 미국의 테크기업들까지 비슷한 노동 강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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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경쟁은 시간을 잠식하는 중이다. 더 빠른 학습, 더 방대한 데이터, 더 정밀한 알고리즘을 위해 결국 사람이 아직까진 투입되고 있다. 70시간이 넘는 노동을 ‘새로운 표준’처럼 내세우는 스타트업도 등장하고 있으며, 실리콘밸리조차 재택근무의 자유를 줄이고 사무실 복귀를 강요하는 흐름으로 돌아서고 있다. ‘성과와 속도’라는 키워드 앞에서 기업들이 내세우는 자유와 창의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모습이다.


반대로 한국의 상황은 묘하게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오히려 노동시간을 줄이고 ‘주 4.5일제’와 같은 새로운 시도를 실험하려 하고 있다. 이미 일부 기업은 금요일 오후를 자유롭게 비워주거나 주4일제를 제한적으로 도입하고 있고, 정부 차원에서도 근로시간 단축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OECD 국가 중 여전히 높은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이지만, 인구 구조의 변화와 삶의 질에 대한 요구가 맞물리며 점차 ‘적게 일하고 더 효율적으로 성과를 내는 방향’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역설이 숨어 있다. AI 경쟁의 최전선에서 미국과 중국은 노동시간을 늘려가며 혁신을 선제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뒤늦게라도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공감대를 모으고 있다. 한쪽은 무한 질주, 다른 한쪽은 숨 고르기.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야 할 한국 입장에서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지만, 동시에 인간다운 삶을 지키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 노동시간의 길고 짧음이 곧 경쟁력으로만 환산되는 시대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지속 가능한 혁신은 사람이 얼마나 건강하게,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AI는 노동의 양을 키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노동을 대체하거나 줄이게 도와줄 도구이다. 그럼에도 세계는 여전히 ‘더 오래 일하는 것’을 답으로 착각하고 있다.

‘996’과 ‘주4.5일’. 두 개의 다른 풍경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속도를 따라잡는 데 급급한 사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효율과 삶의 균형 속에서 더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키워갈 것인가. 한국이 지금 고민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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