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단 하나의 도시만 방문해야 한다면, 그라나다

2024년 11월 17일(스페인 여행 4일)

by 신맛편

스페인을 사랑했던 헤밍웨이는 말했다.
“스페인에서 단 하나의 도시만 방문해야 한다면, 그라나다이어야 한다.”
그 말 한마디면 그라나다를 찾아갈 이유로는 충분했다.

어릴 적,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나는 소설 속 작은 어촌 마을과 장엄한 바다를 마음속으로 그리곤 했다. 미디어도 발달하지 않았고, 해외여행의 경험도 전무했던 시절, 글자만으로 풍경을 이토록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던 소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노인과 바다』를 유쾌하게 읽지는 못했다. 저항할 수 없는 바다에 대한 두려움과, 노인이 짊어진 무거운 감정이 지나치게 선명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단지 글만으로 대양의 무서움과 인간의 고독을 느끼게 했던 작가라면, 그가 스페인에서 최고라 말한 도시는 반드시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여행 시기도 마침 좋았다. 사실 스페인을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11월에 갈 수 있으면서 춥지 않은 나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행을 결정할 때까지는 그라나다를 떠올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계획을 세우다 보니 11월은 스페인 남부를 여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기였다. 여름에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온전히 즐기기 어렵다는 남부의 도시들인데, 11월에는 날씨만으로도 우리 가족을 들뜨게 할 정도로 좋았다. 쾌적함 그 자체였던 날씨는 이번 여행에 더해진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라나다는 렌터카로 이동이 제한된 구역이 많아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오래된 시가지의 좁은 길과 버스기사들의 노련한 운전 실력이 만나,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알바이신 언덕을 오르내릴 때는 버스와 건물의 벽이 거의 스치듯 지나갔다. 아슬아슬함과 긴장감, 그리고 경이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라면 엉금엉금 기어갔을 길을, 덩치 큰 버스로 아무렇지 않게 달리는 기사님들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 경험은 두려움보다 짜릿함으로 남아, 언젠가 꼭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라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단연 알함브라 궁전이다. 내 딸이 아직 아장아장 걷던 2018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드라마를 무척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기타 연주곡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그 드라마는, 제목과 같은 곡의 이국적인 기타 선율과 배경으로 등장하던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을 조화롭게 담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막연히 그 풍경을 동경했지만, 동시에 너무 이국적이어서 쉽게 갈 수 없는 곳으로 마음속에서 선을 그어두었던 것 같다.

직접 마주한 알함브라 궁전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국적이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백색의 유럽식 궁전과 달리, 이곳은 섬세한 문양으로 가득한 붉은 빛의 이슬람 궁전이었다. 그라나다 왕국의 마지막 술탄, 무함마드 12세가 이 궁전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포기하고 나라를 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그 아름다움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이슬람 양식의 궁전이라는 점만으로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충분히 낯설었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궁전 전체를 뒤덮은 정교한 패턴의 조각들이었다. 비현실적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하나의 벽면을 바라보며 어떻게 이토록 정교하고 복잡하게 조각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경외심이 들었고, 그런 벽들로 가득 찬 거대한 공간 속에서 마치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너무도 완벽해서, 그것이 실제 바깥 풍경인지 액자 속 그림인지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아이와 아이 엄마는 알함브라 궁전을 걷는 내내 서로를 불렀다. “여기 봐!”, “여기도 좀 봐!” 그렇게 몇 시간을 걸어도, 발길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각자의 눈으로 알함브라를 담았고, 하나의 눈(스마트폰)으로 그 순간들을 남겼다.

궁전을 나와 그라나다 시가지로 내려오며 생각했다. 알함브라에서 서로를 부르며 나눴던 그 와글와글한 감탄과 기쁨이, 앞으로 우리 가족이 함께할 많은 날들 속에서 문득문득 떠올라 우리를 웃게 해주는 추억이 되겠구나. 동시에 점점 자라나는 딸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도 스쳤다. 이런 추억을 우리는 언제까지 함께 만들 수 있을까? 내 딸도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나 다른 가족을 이루겠지.

아름다운 궁전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포기했던 무함마드 12세와 달리, 나는 누구에게도 싸움 없이 아름다운 내 딸을 내어줄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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