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하 : 스페인에서의 여유

2024년 11월 16일(스페인 여행 3일)

by 신맛편

여행 3일차 아침, 세비야에서 차를 렌트해 론다에서 점심을 먹고
프리힐리아나에서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네르하의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정원에서의 아침

프리힐리아나는 온통 새하얀 집들로 이어져
‘스페인의 산토리니’라 불리는 아름다운 마을이지만
그곳에서 경험한 교통사고로 인해
나는 그 기억을 글로 남기지 않기로 했다.
여행에는 가끔 이렇게

예쁘지만 기록하고 싶지 않은 장면도 뒤섞여 있다.

네르하에서 머문 숙소는
‘파라도르 데 네르하’.
파라도르는 귀족의 저택이나 역사적 건물을
호텔로 운영하는 곳인데
우리가 머물렀던 이곳 역시
어떤 귀족의 집이었을 것이다.
규모도, 위치도, 풍경도
어떻게 말해도 부족할 만큼 훌륭했다.

사실 숙소에 체크인한 첫날 밤에는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숙소 앞 해변을 걸으며 바라본 일출,
조식 레스토랑 창밖으로 펼쳐졌던 바다,
리조트 곳곳에서 보였던 절벽과 마을의 풍경이
단숨에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
내가 잠시 귀족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힘겹게 돌아가던 마음의 톱니가
잠시 멈추고 다시 맞물리는 느낌.
겨우 3~4시간의 아침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오랫동안 정신없이 달려온 나에게
한없이 큰 여유를 선물해 주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 장면들은 되살아난다.
해변에서 아이와 흰 돌로 하트 모양을 만들던 순간,
절벽 산책길에서 감탄하며 걷던 발걸음,
정원에서 마을과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또 찍었던 시간들.
모든 장면이 잔잔한 감동으로 떠오른다.

조식 식당에서 본 일출

문득 그런 생각도 해본다.
지금의 정신없는 삶을 훌훌 털어버리고
절벽 위의 집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사는 삶은 어떨까?
그런 풍경에서는
항상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을까?
혹은 시간이 지나면
그마저도 지루해질까?

아마도 서울에서, 또 일터에서
끊임없이 바쁘게 살아온 내가
비로소 느낄 수 있었던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부러워한다지만,
아름답지만 조용한 네르하에서 자란 사람은

서울의 활기찬 삶을 부러워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네르하에서 아이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작은 것에 감동하는 삶을 상상하는 쪽이 좋다.

서울에서의 나는
정해진 선로 위를 달리는 전차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잠깐 기차길을 벗어나 보니
그 길이 정말 맞는 길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정해진 길을 묵묵히 달려왔지만
내 아이만큼은
이 길 저 길 둘러보며,
작은 오솔길의 아름다움도 느끼며,
인생의 정취를 충분히 맛보며
살아가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아이의 삶을
지지하고 함께 걸어가기 위해
나는 지금보다 더 잘 살아야겠다고,
그 조용한 아침의 바다 앞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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