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신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이성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근대 철학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성과 합리적 사고만으로 모든 지식을 추론할 수 있다고 보는 데카르트의 입장(합리주의)에 반대하여, 감각적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을 강조하는 사조가 등장했으니, 이것이 바로 경험주의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데아를 말하는 플라톤과 현실 세계를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과 비슷해 보입니다. 여기까지 잘 따라오셨다면, 역사가 얼마나 반복되고 있는지 느끼실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 이후, 유럽의 철학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뉘어 발전합니다.
합리주의가 이성과 논리적 사고를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면, 경험주의는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두 흐름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근대 철학을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데카르트와 활동 시기가 겹치는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과학적 방법론을 중시했던 실용주의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이성만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는 전통적 방식을 비판하고, 경험, 관찰, 실험을 통한 귀납적 방법을 철학의 토대로 삼고자 했습니다.
경험주의를 철학의 한 갈래로 확고히 정립한 인물이 바로 존 로크(1632~1704)입니다. 로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선설, 성악설에 대립하며 백지설을 주장했습니다.
백지설을 통해, 인간의 마음은 선천적 지식 없이 태어나며 모든 관념은 감각 경험과 내적 반성을 통해 습득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로크의 백지설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가 전제했던 ‘선천적 지식’을 부정합니다.
경험에서 얻어진 단순 관념(simple ideas)들이 결합·추상 과정을 거쳐 복합 관념(complex ideas)이 된다는 식으로, 지식 형성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근대 경험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데이비드 흄(1711~1776)은 우리가 흔히 당연하게 여기는 인과관계, 자아, 신 등의 개념이 감각 경험을 통해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며 철저히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흄은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A가 일어난 뒤 B가 반복되어 발생한다'는 경험이 축적되어, 그 둘 사이에 어떤 필연성이 있다고 믿게 될 뿐이라는 겁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과의 힘’을 경험으로 알 수는 없다고 함으로써, 경험주의 인식론의 한계를 극단까지 밀어붙였습니다.
흄은 이런 경험주의 태도를 통해 철학의 뿌리를 뒤흔들었습니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지식은 본질이 아닌 그것을 보는 인상에 불과하다는 것 입니다.
동시에 도덕 판단이 이성보다는 정서·감정에 기반한다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윤리학에서의 근본까지 흔들었습니다.
경험주의는 과학적 사고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인간에 대해 깊이 탐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흄은 경험주의를 이어받아 철학계를 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인간은 과연 무엇을 확실히 알 수 있는가?' 흄의 경험주의에 따르자면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인상 뿐이다." 이 흐름은 마치 소피스트가 아테네 법정을 혼란 시켰던 것과 비슷해 보이지 않나요?
그럼 이제 혼란을 진정시키는 위대한 철학자가 다시 등장할까요? 네, 다음은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흄에 의해 큰 충격을 받고,
"흄의 책이 비로소 나를 독단의 잠에서 깨워주었다." 라고 말하며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논쟁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