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유럽 철학은 데이비드 흄의 경험주의로 인해 커다란 파동을 맞았습니다. 흄은 '인과관계란 반복된 경험으로 생긴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폈는데, 이는 우리가 평범하게 받아들였던 지식의 기반 자체를 의심하도록 만든 셈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도덕 판단마저 이성이 아니라 정서와 감정에 기반한다고 봐, 기존의 합리적 근거로 도덕을 정립하고자 했던 시도를 강하게 흔들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을 가라앉히고자 나선 사람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입니다. 극단적인 합리주의자 였던 칸트는 “흄의 저술이 나를 독단의 잠에서 비로소 깨워주었다”고 토로하며, 이성의 한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라는 두 대립을 잠정 종결 시킵니다.
칸트는 인간 이성을 단순한 감각 수용 장치가 아니라, 시간·공간·인과성 같은 선천적 틀을 통해 경험을 구조화하는 주체로 보았습니다. 예컨대 흄이 의심했던 인과관계도, 칸트에 따르면 이미 우리의 이성에 ‘주어진’ 범주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칸트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현상으로 제한했습니다. 인간 이성은 감각 정보를 선천적 범주로 조직하여 현상을 인식하지만, 그 너머의 ‘사물 그 자체(noumenon)’는 직접 알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인간 이성이 강력한 도구이면서도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칸트의 관심은 곧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윤리학적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라는 도덕원리를 제시했습니다.
칸트가 제시한 정언명령은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하라”라는 명제로 요약됩니다. 즉, 특정 행위를 ‘모든 사람이 해도 괜찮을’ 보편적 법칙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도덕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조건 없는 선(善)으로서의 ‘선의지’를 가장 중시했는데, 이는 오로지 인간이 자율적으로 설정한 도덕법칙을 따를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본능이나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세운 원칙에 기초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칸트 윤리학의 핵심 중 하나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이며, 어떠한 목적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보편적 인권 개념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칸트는 흄이 불러일으킨 회의주의를 넘어서면서, 합리주의(이성)와 경험주의(감각·경험)가 각기 지닌 장점을 통합했습니다. 동시에 도덕에서 결과 대신 보편적 원칙과 의도를 중시함으로써, 훗날 ‘의무론적 윤리학(Deontological Ethics)’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그가 집필한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은 독일 관념론은 물론 현대 철학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 “무엇을 확실히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질문과 “무엇을 마땅히 해야 하는가?”라는 윤리학적 질문이 서로 긴밀히 맞물리게 되었고, 인간은 인식의 대상만이 아니라 스스로 도덕법칙을 만들고 실천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로 거듭났습니다.
그가 던진 “당신은 오늘 무엇을 마땅히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우리의 삶 곳곳에서 되새겨볼 가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