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마주한 <비밀의 숲 시즌1>은 한 장의 유서 같은 드라마였다. 사회 해체의 단계에 놓인 대한민국의 사회로부터 도착한 유서.
극 중 이창준 수석의 마지막 편지에 담긴 내용은
2023년 현재, 대한민국 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부정부패와 파괴된 시스템으로 인해 죽어가는 수십, 수백의 목숨들. 개인의 안전에 대한 심리적 마지노선의 붕괴와 그로 인한 사회 구성원 간의 심각한 분열. 빠른 속도로 붕괴 중인 사회 속에서 고뇌하는 개인들.
그렇기에 이 드라마의 엔딩을 보고 나면 언제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붕괴되는 사회, 파괴된 시스템에서 비롯된 너무나 많은 희생을 마주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허무하게 희생된 목숨들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회적 트라우마는 더욱 깊어만 간다. 이를 바라보며 커져가는 두려움과 분노는 때때로 엉뚱한 대상을 향하여 또 다른 희생자를 낳는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사회 앞에서 개인은 고뇌하게 된다.
드라마 <비밀의 숲>에는 그러한 사회를 마주하는 다양한 개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고뇌하던 개인들의 선택과 그 결과를 보여준다. 대다수의 캐릭터들이 입체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쉽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할 수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조직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도 하고, 조직의 뜻에 반하는 사람이 사회에 기여하기도 한다. 이 지점이 이 드라마의 몰입도와 현실성을 높이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실제 우리가 마주한 사회에서도 절대 선, 절대 악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개인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고뇌를 흔들어 깨운다. 그리고는 두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달리기만 하느라 보지 못했던 어깨 위의 먼지를 말없이 털어준다.
다시 한번 이 사회가, 그리고 당신이 향하는 방향이 여전히 괜찮은 곳인지 묻는다. 만약 방향을 잃었다고 판단한다면 그 방향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점검할 기회를 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하기 위한 아주 작은 실천을 고민할 시간을 제공한다.
소위 창크나이트(이창준+다크 나이트의 합성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창준은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다 돌이킬 수 없이 붕괴되는 사회를 바라보며 깊이 고뇌하는 극 중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파괴된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것은 사람의 피'이며 '피의 제물'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랬기에 세상에 비리를 알리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브로커를 죽이고, 유흥업소에 근무 중이었던 여성을 상해한 뒤, 본인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말대로 사람의 피로 인해 역사가 세워지고 시스템을 바로잡을 기틀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더 나아가 파괴된 시스템을 복구시키기 위해 소수의 희생을 경시하는 것은 더더욱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극 중 황시목이 방송에 출연해 이창준을 '자신이 타인을 단죄할 수 있다고 믿고 그 과정에서 타인의 생명을 해한 점'을 짚으며 그를 '괴물'로 칭하고, '실패했다'라는 표현을 할 때 가슴이 아린 것은, 그가 사회 속에서 직면한 고뇌가 현재의 우리와 아주 닮아있고 그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으나 그 최선의 방향이 옳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고뇌해야 한다. 소수의 원치 않는 희생으로 시스템을 복구시키려 한 것이 패착이라는 것을 아프게 꼬집은 황시목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희망적인 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지키며 침묵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아닐까.
가장 사랑하고, 가장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비밀의 숲을 추억하게 만들었던 대사와 함께 글을 마친다.
나의 이 글이, 누군가의 잠들어있던 고뇌의 시작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 현실은 대다수의 보통 사람은 그래도 안전할 거란 심리적 마지노선마저 붕괴된 후다. 사회 해체의 단계다. 19년... 검사로서 19년을 이 붕괴의 구멍이 바로 내 앞에서, 무섭게 커가는 걸 지켜만 봤다.
설탕물 밖에 먹은 게 없다는 할머니가 내 앞에 끌려온 적이 있다. 고물을 팔아 만든 3천 원이 전 재산인 사람을 절도죄로 구속한 날도 있다. 낮엔 그들을 구속하고 밤엔 밀실에 갔다. 그곳엔 말 몇 마디로 수천억을 빨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난 그들이 법망에 걸리지 않게 지켜봤다. 그들을 지켜보지 않을 땐 정권마다 던져주는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받아 적고 이행했다.
우리 사회가 적당히 오염됐다면 난 외면했을 것이다.
모른척할 정도로만 썩었다면 내 가진 걸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몸에서 삐걱 소리가 난다. 더 이상은 오래 묵은 책처럼 먼지만 먹고 있을 순 없다.
이 가방 안에 든 건 전부 내가 갖고 도망치다 빼앗긴 것이 돼야 한다. 장인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의 유품이 아니라, 끝까지 재벌 회장 그늘 아래 호의호식한 충직한 개한테서 검찰이 뺏은 거여야 한다. 그래야 강력한 물증으로서 효력과 신빙성이 부여된다.
부정부패가 해악의 단계를 넘어 사람을 죽이고 있다.
기본이 수십, 수백의 목숨이다. 처음부터 칼을 뺐어야 했다. 첫 시작부터.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조차 칼을 들지 않으면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다.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시간도 아니요, 돈도 아니다. 파괴된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사람의 피다. 수많은 사람의 피. 역사가 증명해 준다고 하고 싶지만 피의 제물은 현재 진행형이다. 바꿔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든 찾아 판을 뒤엎어야 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이미 치유 시기를 놓쳤다.
더 이상 침묵해선 안 된다. 누군가 날 대신해 오물을 치워줄 것이라 기다려선 안 된다. 기다리고 침묵하면 온 사방이 곧 발 하나 디딜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이제 입을 벌려 말하고, 손을 들어 가리키고, 장막을 걷어 비밀을 드러내야 한다."
"나의 이것이 시작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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