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의 달콤함. 그리고 우리의 주체적 삶.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인생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지를 고민한다. 어렸을 때 보았던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을 닮고 싶어하고, 티비나 페이스북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하며 동경한다. 내 삶이 어떠했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성취를 갈망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람들의 이런 기대 수요에 부응하듯 다양한 자기계발의 논리들이 공급되어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준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 저렇게 해봤더니 효과적이더라. 내가 마시는 물이 쓴 물인지, 단 물인지, 짠 물인지 분별하기보다 내 갈증을 채우는 것이 급급하기에 우리는 열심히 물을 마신다.
나의 생각을 적은 이 글도 어쩌면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자기계발서의 무책임함의 연장선상일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지만 용기를 내본다.
자기계발. 신자유주의의 물결로 불안정성이 확대된 이 시대에 자기계발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녀야 할 무기가 아닐까? 나의 가치를 부단히 빛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나보다 더 빛나는 저녀석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도태되는 것.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게 되었다는 무기력증을 느끼는 것. 그런 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피곤하다. 한병철 교수가 독일에서 출판한 '피로 사회'라는 저서의 제목처럼 우리는 지친다. 끊임없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열심히 달리는 우리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보이지가 않아서 더 지친다. 심지어 마라톤도 42.195km라는 목표가 있는데, 우리의 노력에는 끝지점이 보이질 않는다. 나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의 자문을 구해본다. 성공했다고 느껴지는 사람들. 내가 동경하는 스타들과 기업가들의 인생은 어떠했을지,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해주는 조언은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본다.
그러나 자기계발서의 가장 큰 맹점은 책임감이 없다는 부분이다. 마치 수학익힘책에서 문제를 풀다가 모를 때 정답을 슬쩍 봐버리면, 더 이상 문제풀이 과정은 내 안중에서 벗어난다. 답을 알고 있다는 달콤함이 나의 노력이라는 주체적 행위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자기계발서는 정답이 아니다. 물론 저자는 그러한 노력에 따라서 어느 정도 '성공적 삶'을 살았고 자신의 경험을 타인에게 알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그의 방법은 절대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계발서가 마치 내 인생의 정답으로 착각하기가 너무 쉽다. 계발서는 내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대로 따라가는 방향은 나의 주체성을 잃는 길이 될 수 있다.
어쩌면 구조의 탓일까? 100인에게는 100가지의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신자유주의는 빠르게 많은 자본을 축적하는 방법이야말로 성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보니 나의 한계를 한걸음 한걸음 이겨내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이미 성공한 자들의 방법이라도 쫓아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게 되는 건 아닐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나의 인생은 역시나 나의 것이다. 내가 어떠한 삶을 사는지는 오롯이 나의 주체성으로 꾸려나갈 문제이지 그 누구에게도 강요되어질 수 없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