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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돕기 Jul 20. 2016

판단력의 상실

우리가 생각을 해야하는 이유.

밀즈. <사회학적 상상력>을 보며-


 우리는 흔히 지금의 우리 사회, 이 시대를 보며 인문학의 위기라고 말한다.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data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미래를 예측하고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 뛰어난 기술력만큼 필요한 것은 없어 보인다. 학문 영역을 크게 나눠보자면 자연과학과 사회(인문)과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실 사회과학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개인적인 불호는 '과학'이라는 말이 상당히 객관적이고 '진리'라고 느끼는 데서 기인하기 때문에 단순히 인문사회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 다시 돌아가, 두 가지로 나눈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은 각각의 탐구 대상을 두고 있다. 용어에서 드러나듯이 자연, 때에 따라 '사람'도 이곳에 포함이 되기도 하겠지만 주로 우리 주변에 공존하고 있는 여러 생물들 또는 기후까지도 모두 이 범주에 포함된다. 다른 하나인 인문사회학은 주로 '사람'을 중심적으로 탐구한다.


 이 두 대상을 관찰하는 각각의 학문은 상반된 열매를 맺는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탐구되는 두 대상이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첫째로 자연과학은 경험적으로 일관성을 갖는다. '과학적'이라는 의미가 전능하다는 뜻으로 착각하는 데 일조한 핵심은 [오차없는 지속성]에서 비롯된다. 즉, 가시적인 예측이 가능하다. 단적인 예시로 우리는 일기예보를 들 수 있다. 인간의 발전된 기술은 구름의 이동과 계절의 변화, 다양한 변수들의 조합을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가까운 미래의 자연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자연의 속성은 반복성과 지속성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만약 자연에게 자유의지가 있어 자신이 원하는대로 날씨가 변동이 가능하다면, 인간에 의한 자연정복은 가능했을까?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은 인간에게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유사하게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체들도 반복적이고 지속적이라는 속성이 적용된다. 기후라던지 무생물과 같은 것들보다는 덜하지만, 동, 식물들의 생활반경, 자연적 흐름에 따른 행동 범위 등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 그래서 자연과학은 '법칙'을 가장 강조하게 된다. 법칙에서 벗어난 것은 [예외]적인 행위로써,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자연에게는 사람이 갖는 '의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인문사회학은 '사람'을 탐구한다. 사람을 탐구하는 것은 가시적인 것과 가시적이지 않은 것으로 분류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시적인 모습들을 통해서 가시적이지 않은, 즉 정신적인 부분들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추어진다. 즉, 사람의 행동, 행태, 삶의 모습, 교류 등의 총체적인 가시성들을 통해 그들의 정신적인 부분들을 이해하고 이념화시키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인문사회학은 일정한 [법칙]을 만듦이 쉽지 않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있다. 혹자는 사람의 각 연령층, 생애주기에 따른 유사한 행동패턴과 필요로하는 욕구, 경험이 있기 때문에 법칙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고 반문을 제기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 더 면밀하게 들어가본다면 거시적으로는 문화적 위치, 지정학적 위치, 계급적 위치에 따라, 미시적으로는 개인의 성향, 가정배경, 사회자본의 영역 등에 따라 행동패턴, 욕구, 경험은 다르게 습득되어 진다. 즉, 인문사회학은 [다양성]을 전제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질문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전 세계적인 흐름이라고 보는데-) 인문사회학의 퇴보와, 자연과학의 급격한 쏠림현상, 따라서 인문사회학에 침투되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과연 언제까지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인구학적 그래프에 따른, 그리고 통계학적인 근거에 따른 여러가지 인간사회에 대한 예측들은 우리 사회에 대한 너무나 얕은 진단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나의 논지는 양적 방법론이나 통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니다. 그저 자연과학은 자연과학의 탐구 대상에 맞는 방법이. 인문사회학은 인문사회학의 탐구 대상에 맞는 방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의 화려함, 현란하고 얕은 정보들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중하고 깊은 사고를 필요로하는 인문사회학은 소외될 수 밖에 없어보인다. 대중들 스스로가 철학적인 사고와 깊은 사색의 유희를 즐기기보다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인스턴트에 입맛을 들이게 되면 오히려 '의도에 어긋난' 이데올로기 생산자들에게는 좋은 먹이감이 될 수밖에 없다. 오른쪽이 옳다. 왼쪽이 옳다. 외치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정보의 소화력을 잃은 대중은 오른쪽, 왼쪽으로 찢어져 달리기에 급급할 뿐이다.


 넘치는 '사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우리에게 밀즈는 지식인으로써 가져야 할 자세를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내 생각, 나의 주장을 분명하게 견지하고 있다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어긋난 의도]에게서 적어도 피할 길을 만들 능력은 갖추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인문사회학의 무너짐이, 후퇴함이, 비주류로 전락하는 이 시대가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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