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첫날, 월요일이었다.
아직 덥긴 하지만 성큼 다가온 가을을 느끼며, 9월이 주는 왠지 모를 시원함과 산뜻함을 안고 출근했었다. 학기는 이미 시작했지만 다시 한 번 새학기를 맞이하는 기분으로 힘차게 시작하려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분노의 역치가 낮아진 건 교사가 된 이후부터인 것 같다. 특히 학교에서는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갈등 상황이 불편하기도 하고, 아이들과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고 싶지도 않다. 이젠 그럴 에너지조차 없어서 대부분의 상황은 그냥 넘겨버린다.
그런 내가 조용히 분노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날 3교시 수업이 끝나갈 즈음에 1학년 한 여자아이가 ‘존나’라는 단어를 큰 소리로 내뱉었다. 교실 안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 꽂혔다. 그냥은 넘어갈 수 없겠다 싶어 수업 후 아이를 따로 불러 이야기했다. 선생님 앞에서 말을 좀 가려서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아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반항 가득 치켜뜬 눈과 깜빡이지 않는 눈. 나와 눈싸움을 시작하려는 듯했고, 그 아이는 그렇게 눈과 표정에 모든 분노를 뿜어냈다.
"눈을 왜 그렇게 뜨니?"
"제 눈빛이 어떤데요?"
"보통 어른이랑 얘기할 땐 그런 눈과 표정을 하지 않아."
속으로 생각했다. 아, 시작이구나. 그분이 오셨구나.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화를 계속했다.
"너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누군가 너를 위해 조언을 하면 예의는 지키는 거야. 선생님이 너를 위해 얘기하는 거잖아, 00아."
"아~ 제 눈빛이랑 표정을 바꾸라는 말씀이신 거죠?
선생님이 조언은 하실 수 있는데요, 그걸 받아들이는 건 제 자유고요.
선생님이 하시는 건 지금 조언이 아니라 강요고요.
뭐 선생님이 말하는 걸 다 받아들이면 그건 호구죠.
엄마 아빠가 이렇게 낳아줘서 이런거고요. 제 말투는 원래 이래요."
…
"(아이의 말투를 흉내 내며) 보통 이런 말투를 비아냥 거린다고 해."
"아닌데요?"
"그래?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너가 사람과 관계 맺는 사회적 기술이 부족한 것 같네..."
"지금 저 사회성이 떨어진다, 모자란다 이 말씀이세요?????"
뭐, 대충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이렇게 꽉 막힌 대화는 오랜만이라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을 극단으로 받아들이며 흥분하는 아이. 어차피 이런 아이와는 절대 대화란 걸 할 수 없음을, 당장에 변화시킬 수 없음을 안다. 다음 교시 수업 시간이 훌쩍 지났기에 대화의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선 아이를 돌려보냈다.
아이들과 지내며 가장 힘든 케이스는 듣지 못하는 아이를 만날 때다. 이런 아이들은 병원을 가서 상담을 받아도 의사의 말도, 그 어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전혀 호전되지 않는 아이들을 종종 보곤 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최대한 아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성장 과정에 신뢰할 만한 어른의 부재가 있었든,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서 그렇든 아니면 단지 극심한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이든 다양한 이유들을 애써 추측해 본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 아이들과 대면하는 것은 기가 빨리고, 교사인 나도 상처를 받는다.
교사 생활을 하며 별의별 아이들을 만나고, 부딪쳐왔다. 그래도 10년 차가 되니 이제는 아이와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감정을 억누르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 앞에서 감정적으로 화를 내지 않았고, 끝까지 차분한 말투를 유지했다. 교무실에 와서도 씩씩거리며 선생님들께 하소연하듯 쏟아내지도 않았다. 다만 퇴근하는 차 안에선 치졸한 생각들을 가득 품기도 했고, 친한 친구들 단톡방에 이야기하며 욕했던 것을 고백한다.
시간이 지나니 내 마음도 추스러졌고, 그 아이를 앞으로 어떻게 대할지 생각했다. 그리고 '시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됐다.
시선은 때론 말보다 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시선이 인격을 만들기도 한다. 사랑스러운 시선이 쌓이면 아이는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자랄 것이고, 따갑고 무시하는 시선이 쌓이면 아이는 적대감에 찬, 말 그대로 미운 아이가 될 것이다. 알고보니 그 아이는 평소에도 다른 선생님들께 많은 지적을 받는 아이였다. 곱지 않은 시선들이 늘 따라다녔을 것이다.
'나라도 따뜻하게 바라보자. 아무 일 없었던 듯,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수업해 보자.'
라는 결단이 섰다. 혈기 왕성했던 과거의 나는 아이들 앞에서 '호구'가 되기 싫었고,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기꺼이 '다정한 호구'가 되어보기로 한다. 상처를 상처로 되갚지 않고 순간순간을 용서하는 어른이 되어보기로- 미약한 다짐을 해본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아이와 다시 만난 수업에서 나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최대한 다정하게 수업을 이어나갔다.
무슨 일이 안 그렇겠냐마는 교사 또한 도를 닦아야 살 수 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미성숙한 인격의 아이들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으며 때론 버거울 때가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보다 변화 가능성을 단 1프로라도 갖고 있는 존재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차마 따뜻한 말을 건네지 못할 때라도, 최소한 내 눈빛과 시선만큼은 통제하고 싶다. 경멸 어린 시선으로 아이가 다치지 않게.
오늘도 나는 출근한다. 도를 닦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