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고졸이었다.

기억은 연어처럼 돌아온다.

by 남자까

유쾌하지 않은 나의 묵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흔한 고등학교 졸업장이 내 삶의 희망이었다. 공부는 때가 있다고 말하지만 시작하는 지금이 가장 공부하기 좋은 때이다. 어떤 이유도 필요 없다. 무조건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은 공부라고 생각기 때문이다.


그 날 교실 창가는 유난히 따뜻했다. 시끌벅적하던 복도는 먼지만 햇살에 날고 있었다. 텅 빈 교실에 학생 둘이 책상 위에 책 한 권을 펼쳐놓고 먼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6년을 마무리하는 수학여행 가는 날이었다. 수업일수를 채우러 친구들이 수학여행 갔다 오는 이틀을 교실에서 책 읽기를 했다. 교실에서 어떤 책을 읽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13살 어린아이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차라리 결석 처리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했다. 독후감은 대충 써놓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외갓집에서 학교 다니고 있던 동생은 꼭 내가 돈 벌어서 수학여행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일기장은 없어졌지만 내용은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교실에 함께 있었던 친구는 모르는 사람처럼 눈을 피했다. 혼자 남아있을 줄 알고 왔다가 내가 있어 많이 놀란 얼굴이었다. 두 번째 날은 조금 적응이 되어 교실 안을 돌아다녔다. 친구는 여전히 나를 피했다. 친구들은 기차 안을 돌아다니며 신나 하겠지? 새 옷을 입었겠지? 새신도 신었을 거야~맛난 건 또 얼마나 준비했을까? 부러움과 궁금함이 머릿속에서 춤을 춘다. 나는 5학년 초에 전학 왔다. 조용한 작은아이는 친구들과 잘 적응하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 만난 친구들은 내가 수학여행

을 함께 가지 않은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전학 온 친구가 수학여행을 가던지 못 가던지 별 관심이 없었다. 5학년 말부터 친구들은 수학여행 얘기를 했다. 할머니의 돈이 없다는 소리를 자장가럼 들었던 나는 애초에 수학여행을 생각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왔다. 학교에 더 가고 싶지 않았다.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고 빈 교실에서 독후감을 쓰고 있었던 일이 부끄러웠다. 늦게 슬그머니 교실로 기어 들어 갔다. 친구들은 수학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느 라 내가 온 것도 몰랐다. 다행이었다. 수학여행 첫날밤 선생 님 몰래 밖에 나갔다 온 일 자는 친구 얼굴에 사인펜으로 그 림 그린일 한방에 모여 노래 부르고 게임했던 일... 많이 부 러웠다. 나는 아직 수학여행이 가고 싶다.

4학년말 전학가기전...

45년 전으로 먼 길을 거슬러 가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 너무 많다. 그중에 가장 나를 오그라 들게 했던 중졸이란 학력이다. 어떤 무속인은 공부를 많이 했으면 나라 녹을 먹고 살 사람이라고 혀를 찼다. 정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최종학력이 중졸은 아니였어야지 맞다. 왜 그때는 공부할 생각을 못했을까?


이유 없이 아픈 5월

아버지는 목수였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아버지는 현장 감독이었다. 늘 땀내와 막걸리 냄새가 썩여 코를 막곤 했었다. 동해 바닷가 평해, 영해를 가면 아버 지가 지은 학교가 있다고 엄마에게 들었다. 아버지 얼굴이 기 억 나지 않는다. 어쩜 그리도 흔적 한 장 없이 가셨을까? 할머니는 먼저 간 아들이 미워 사진을 모두 태웠다고 나중에 들었 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공사현장에서 추락하여 목 아래 전체를 기브스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서워 옆에 가기가 무서웠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인 나의 가정교

사였다. 그 당시엔 한글도 학교에 가서 배웠었다. 한글을 어느 정도 배워서 입학했고 더하기, 빼기, 구구단까지 배웠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회초리를 옆에 두고 공부시켰다. 덕분에 3학년까지 우등상을 받았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 일의 특성상 공사현장 따라다녀야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외갓집으로 보내졌고 어떻게 다시 아버지와 엄마가 계신 집으로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6살이 작은 동생은 외갓집에서 지냈다. 동생과의 만남과 이별은 내 기억의 아지랑이다. 11살 되던 봄 만취해 집에 온 아버지는 그날도 술을 찾았다. 노란 주전자에 막걸리 20원어치를 사 왔다. 술잔을 앞에 두고 평소 술 취해 자주 하던 "아버지 죽으면 너희 셋이 잘 살 거래..." 그 얘기를 끝내지도 못한 채 앞으로 꼬꾸라지며 토했다. " 엄마 아버지 토했다 얼른 치워~ 냄새나~~" 나는 코를 잡고 방구석으로 도망갔다. 토사물을 치우느라 아버지를 바로 눕히던 엄마가 다급하게 불렀다. " 이양반이 왜 이래 빨리 가서 삼촌 불러와 아버지 이상하다 아이고 미야 아버지~" 엄마의 통곡소리를 뒤로하고 달렸다. 아버지와 일하는 분들을 삼촌이라 불렀다. 함께 달려온 삼촌이 아버지를 업고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갔다. 엄마는 병원 복도 의자에 기진맥진 쓰러져 있었고 나는 옆에 앉아 다리를 까불며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 응급실 문을 열고 나오는 의사의 흰가운이 무서워 엄마 뒤에 숨었다. 손을 쓸 수가 없다며 집으로 모셔 가라고 매달리는 엄마의 손을 밀어냈다. 고혈압과 식중독이 원인이라고 했다. 일 마친 후 냇가에서 잡은 민물고기가 화근이었다. 국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동네에서는 아까운 사람 하나 죽었다고 난리였지만 정작 우리 가족은 덤덤했다. 동생을 업은 채로 피범벅이 된 엄마를 보며 나는 울고만 있었다. 5월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계절이다. 이유 없이 아픈 달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 동생, 나는 외갓집에서 지냈다. 5학년 초에 본가로 다시 보내졌다. 처음 가는 아버지 고향 이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그때는 몰랐다. 초등학교 를 졸업할 무렵 나 때문에 할머니와 작은아버지가 심하게 다투 는 걸 자는 척하며 들었다. " 여자가 중학교는 가서 뭐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할머니는 돈이 어디서 나냐고 난리였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인걸 할머니가 알리가 없었다. " 요즘은 여자도 고등학교는 나와야 사람 구실 한다는데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계세요" 결론은 듣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할머니가 " 작은아버지가 중학교 보내 준단다 나는 모르겠다." 옥신각신 하더니 결국 중학교는 보내 주기로 했었나 보다. 학교에 들어가는 돈은 작은아버지가 책임 지기로 했다. 술주정이 심했고 가끔 때리기도 한 작은아버지였는데 중학교를 보내 준다니 놀라웠다. 할머니는 중학교 다니는 3년 아침밥을 시켰다. 설거지까지 하고 나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나는 늘 지각생이었다. 졸업이 가까워질 때 담임선생님께서 산업체 고등학교에 입학 추천서를 써 주셨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방직공장이었다. 할머니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 비록 야간 고등학교였지만 고등학생이 될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중학교가 내 학창 시절 마지막이 될 줄 아무도 몰랐다. 중학교 졸업식날 친구의 꽃다발을 빌려 사진 찍은 아이는 나뿐이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할머니는 미용기술을 배우라고 미장원에 취직시켰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미용사가 돼 가고 있었다. " 시집가지 말고 돈 벌어서 나하고 살자~" 할머니가 취직시킨 이유였다. 그런 할머니가 싫었지만 미용사도 되기 싫었다. 창밖으로 고등학교 교복 치마를 입고 지나가는 친구들을 보고 파마 기구를 씻으며 울었다. 큰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큰고모의 신내림 굿 소식에 머리가 복잡했다. 미장원에서 일한 지 일주일 뒤부터 파마를 말기 시작했다. 동네 할머니 뽀글 파마는 특별한 기술 없이도 할 수 있었다. 막 재미를 붙일 즈음에 원장 남편의 느끼한 눈빛, 스치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미장원에서 도망갈 핑계가 늘었다. 원장님에게 엄마를 보고 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차비를 받아 그 길로 부산행 완행열차를 탔다. 7시간을 달려 외갓집으로 갔다. 엄마는 재혼을 했고 나와 함께 살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쩌다 결혼을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사는 게 바빠 나 같은 건 없었다. 17년 만에 이혼을 했다. 아이들에겐 평생 죄인으로 살고 있지만 후회는 없다. 이혼을 하고 나를 찾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봉사 많이 하고 좋은 일에 앞장서서 한다고 좋은 사람이라 말한다. 그건 내 안에 살고 있는 자책감에 대한 나름의 보상이다. 자식 안 보고 사는 여자가 봉사는 무슨?이라고 한다면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안 보는 게 아니라 못 보는 거라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살아내느라 바빠 잊고 있었다. 공부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검정고시는 학원을 등록해야 시험을 볼 수 있다고 들었다. 수강료가 부담스러웠다. 독학하기는 책을 놓은 지 오래되어 자신이 없었다. 겨우 컴맹을 면했을 즈음에 검색을 하다가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 모집 광고를 보았다. 뛸 듯이 기뻤는데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경기 여자고등학

교 방송통신고등학교가 집에서 가장 가까웠다. 다음날 바로 입학원서를 접수했다. 2016년 내 나이 50살이었다.


내 꿈은 이루어졌다.

입학식도 일요일이었다. 입학식장 입구에서 한복 입은 선배 님들이 안내를 했다. 커다란 전지에 이름과 반이 배정돼 있었다. 처음 보는 아줌마들은 배정된 반별로 앉아 두리번 거 렸다. 서먹하고 아무도 모르게 온 입학식장 의자가 불편했 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으리라 본다. 축하 꽂다

발을 가져온 가족도 보인다. 엄마의 늦은 학교생활을 축하하러 온 아들, 딸이 부러웠다. 신입생 환영인사가 이어지고 제일 앞자리에 앉아 계신 담임선생님을 훔쳐보기도 했다. 어떤 분이 담임이 될지 궁금해지는 건 나이와 상관없었다. 교가가 슬픈 노래도 아닌데 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봄엔 햇살 좋은 학교 근처 양재천을 걷기도 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허수아비를 안고 깔깔거렸다. 다섯 반이 움직이니 시끌벅적 천상 여고생이다. 간식도 준비해서 먹고 선생님과 사진 찍으며 맘껏 즐겼다. 버스를 타고 1박 2일 봄소풍 도갔다. 장기자랑을 준비하며 서로 더 가까워졌다. 3년간 공부를 함께하는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끈끈한 정을 쌓았다. 나도 고교 동창 생이 생겼다.


3년이 후다닥 지나갔다. 일주일에 한 번 출석해서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얼마나 간절했던 시간과 추억이었는지... 후배들의 졸업노래를 들으며 여기저기 훌쩍임이 들렸다. 나는 소리 없이 통곡을 했다.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가끔 대단하고 훌륭한 분들이라고 칭찬해 주셨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여러분들이 최고의 학생이라고...

꿈같은 1000일을 보내고 내 자존감이 키만큼 커졌다.


공부는 때가 있다지만 시작이 가장 빠른 때다.

규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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