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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꿈에게

영화 <프란시스 하> - 노아 바움백 - 2014

by 한비

<프란시스 하>를 보는 내내 <레이디버드>가 생각났다. 새크라멘토를 떠나온 레이디버드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부모가 지은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면서 신을 믿지 않는 건 이상하다고 말하던 크리스틴과 접힌 이름표를 끼워 넣는 프란시스. 절대 접힐 것 같지 않던 야생마 같은 두 여자는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처음과 다른 사람이 된다. 레이디버드의 그것은 분명 성장이었다. 떠날 수 있게 되고서야 새크라멘토를 사랑하게 됐고, 가족을 받아들이게 됐다. 크리스틴이 아니라 레이디버드라 불러달라던 시기를 거치고 나서야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하게 됐다.


하지만 프란시스의 타협은 레이디버드보다 뼈아프게 느껴진다. 프란시스는 무대에 서지 않고 안무가가 됐으며, 무용단의 사무 일을 한다. 절대 하지 않겠다고 한 일들을 해가며 조금씩 꿈에 가까워지고 혹은 멀어진다. 머리색이 다른 쌍둥이라고 말하던 절친한 친구는 이제 프란시스만의 것이 아니고, 자신의 집이 생겼지만 제 이름을 모두 적어 넣기엔 비좁다. 드디어 27살에 걸맞은 일인분을 하게 된 프란시스는 분명 처음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프란시스는 자신이 가난한 예술가라고 말한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이긴 한데 진짜로 하고 있진 않은 일. 그것이야말로 꿈이다. 견습 단원에서 잘리고 생계를 위한 일을 전전하게 된 프란시스는 그제야 자기 인생을 책임질 수 있게 된다. 꿈을 좇던 프란시스는 절친인 룸메이트와 헤어지고, 새로 사귄 친구와 룸메이트를 했다가, 돈이 없어 고향에 가고, 홧김에 파리로 떠난다. 그리고 모교로 돌아가 기숙사에서 살며 조교로 일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춤을 추겠다고 다짐했지만 춤추는 걸 그만두고 프란시스의 인생은 안전 궤도에 올랐다. ⁠


프란시스의 변화가 크리스틴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크리스틴은 19살이고 프란시스는 27살이기 때문일까? 프란시스가 철없이 꿈을 좇는 모습도 갑갑하긴 마찬가지지만, 안무를 짜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무일을 하는 프란시스를 보는 것도 기분이 이상하다. 현실과의 타협이라는 건 슬픈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나이가 늦도록 꿈을 좇던 사람이 현실에 '굴복'하는 걸 지켜보는 것은 마음이 안 좋다.


프란시스의 이런 시기를 그저 방황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런 시기도 필요했을 뿐. 이게 아니면 안 될 것 같고 이걸 위해 뭐든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때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그렇게 절실하거나 유일하지 않다. 직접 무대에 오르지 않아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안무를 짜는 일로도 충족될 수 있는 욕구인 것이다.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있는 것도 죽도록 원하고 노력하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항상 꿈의 곁에서 일하다 보면 언젠가 정말 꿈을 이룰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모두 필요한 시기였고 인생의 한 부분이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 프란시스 하가 된 것처럼, 그 모든 일이 지나서 인생이 되는 것이다. 꿈을 좇던 여자는 결국 현실에 '타협'한다. 하지만 두 시기 모두 프란시스에게 필요했고, 그는 여전히 행복하고 이제 자신만의 집도 있다. 그렇다면 인생이라는 건 그렇게 슬픈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계속되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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