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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비 Feb 28. 2024

<바람이 분다> 돌풍이 부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 <바람이 분다> - 미야자키 하야오 - 201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나니 <바람이 분다>가 더 좋아졌다. 사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전작 <바람이 분다>와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바람이 분다>가 실패작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는 제로센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리코시 지로를 주인공으로 하지만 전기는 아니다. 낭만적인 허구를 잔뜩 섞은 이 영화가 호리코시 지로에 대한 미화로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물론 이 영화에서 지로는 매우 어리석은 남자로 묘사되지만, 그게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분다>는 너무 아름답다.


<바람이 분다>를 다시 보니 <파벨만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지로의 모습은 언뜻 새미와 닮았다. 새미 파벨만스는 싸우는 부모님을 보며 이 장면을 영화로 찍는다면 어떨지 상상한다. 가족들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는 영화에 대한 영감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에 새미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보리스는 새미에게 넌 예술을 포기하지 못할 거라며 저주인지 충고인지 모를 말을 한다. 지로가 비행기에 가지는 열망은 이런 것과 비슷하다. 지로는 아픈 아내를 외롭게 죽게 하고 여동생에게도 소홀하다. 지로의 삶은 비행기에 미쳐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 어리석은 예술인의 삶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주 커다란 차이점은, 지로의 꿈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죄가 된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랬다는 것이다. 지로의 비행기에 대한 열망을 영화에 대한 열망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바람이 분다>의 지로의 죄는 우리와 너무 가까운 시대의 것이고, 지로는 시대에 휩쓸려 죄인이 됐다기에는 적극적인 가담자다. 역사 속에서 제로센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생각하면 <바람이 분다>는 정말 염치없는 작품이다. 실존인물 호리코시 지로는 전투기를 만든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래서 <바람이 분다>는 실패작이다.


하지만 나는 <바람이 분다>가 좋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의 대사가 원래는 "오세요"였다는 걸 알고는 더 좋아졌다. 분명 아내는 모든 것을 잃은 지로에게 계속 살아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원래 대사는 내가 있는 저승으로 오세요, 였다... <바람이 분다>는 수치를 모르고 꿈을 좇은 어리석은 남자가 파멸하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계승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지로는 모든 것을 외면하고 비행기를 만든다. 그는 가족을, 굶주리는 일본의 아이들을, 자신이 만든 전투기로 죽어나갈 사람들을 외면한다. 비행기의 무덤에 외롭게 서 있는 지로의 모습은 자기 연민보다는 자조에 가깝다. 물론 이 파멸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그렇다. 지로는 결국 꿈의 비행기를 만드는 것에 실패한다. 그는 제로센을 완성했지만 그가 만들고 싶던 건 기관총이 아니라 사람을 싣고 들판을 나는 비행기였다. 비행기의 무덤에 선 지로에게 남은 것은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죄와 수치다. 이만한 자조가 있을까. 결국 그는 삶의 의지를 잃고 죽은 아내의 부름을 듣는다.


그럼 왜 대사를 바꿨을까. 그것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니 더 와닿는다. <바람이 분다>의  캐치프레이즈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이다. 사실 이건 삶의 의지를 다지는 말이라기보다는 그가 평생 동안 안고 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말이다. 돌풍이 부는 세상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내는 지로에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염치없게도 살아가라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상통하는 부분인데, 수치를 아는 이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삶의 의지를 잃지 말라고 말한다. 나는 그 수치와 악의, 죄의식이 단지 일본인이라는 것에서만 기인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를 사는 이라면 숨 쉬듯 죄를 짓고 있고 그 죄는 누구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게 복합적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그중 하나가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그 수혜자인 자신일 것이다. 하지만 일부라고 해서 그 마음이 작은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을 보며 내가 느끼기론 그랬다. 그래서 '살아가라'는 말은 지로나 일본인뿐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말이고, 특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느껴지는 바로는 젊은 세대를 위한 말이다. <바람이 분다>만 봤을 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나니 확신이 든다.


<바람이 분다>에서는 '비행기는 저주받은 꿈'이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저주받은 것은 비행기뿐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대로 애니메이션 역시 저주받은 꿈이고,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꿈이 저주받았다. 현대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이용하고, 어떤 것도 본연의 가치만으로는 가치 있지 않다. 혹은 지로나 새미처럼 꿈을 좇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꿈은 저주받았다. 하지만 꿈이기에 놓을 수 없고, 그건 마치 삶과 같다. "그 아이의 생명은 비행기구름", "죽는 순간에도 하늘을 보고 있었네"라는 가사처럼, 꿈이란 곧 삶이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겠다는 의지는, 많은 것을 잃게 되더라도 꿈을 꾸겠다는 의지와 같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여, 날개를 흔들고 당신에게 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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