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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비 Mar 29. 2024

<매기스 플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영화 <매기스 플랜> - 레베카 밀러 - 2015

매기는 단단하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조젯이 매기를 정확하게 봤다. 매기는 계획적이고, 집착적이고, 통제광이며, 세상을 모르는 사람이 그렇듯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면이 있다. 매기는 정말로 결혼이 안 어울리는 여자다. 영화의 시작부터 매기는 고독을 선언한다. 매기는 6개월 이상 사랑을 할 자신이(그리고 받을 자신이) 없다며 정자를 기증해 줄 남자를 찾는다. 그런 매기에게 낙점된 남자는 고등학교 동창 가이다. 가이는 순박하지만 껄끄러운 남자다. 대화를 할 때 얼굴을 들이밀고 말하는 버릇이 있으며, 순순히 정자 기증을 해주겠다고 하면서도 매기에게 흑심을 품고 치근덕거린다. 수학을 좋아하던 가이는 이제 피클을 판다. 아하니까 옷깃만 잡고 놓아준 거야. 그 대체 어느 정도의 마음일까?


사실 <매기스 플랜>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매기의 형편없는 계획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게 바로 혼자 아이를 낳는 일이었다는 거다. 정자를 기증받아 혼자 아이를 갖기, 유부남인 존과 사랑에 빠지기, 존을 다시 전처 조젯에게 돌려주기 등 매기의 계획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매기의 계획 중 타인에 대한 일들은 거의 다 실패한다. 딱 하나 실패하지 않은 것은 "6개월 이상 사랑할 자신이 없다"는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계획이다. 매기는 세상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최고의 이해자다.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닐까? 내 인생의 적은 나고 아군도 나다. 나를 안다면 내 인생도 이길 수 있는 것.


이 우스운 치정극 끝에 매기가 얻게 되는 교훈은 무엇일까. 매기는 일단 소중한 딸을 얻었다. 그리고 조금 자랐다.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얻었고, 남들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을 만큼 겸손해졌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좋은 것이 인생이라, 옷깃만 잡고 놓아준 사람이 내 인생에 진득하게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매기는 그다지 성숙한 사람은 아니다. 주변 사람을 통제하려 들고 이기적이며 자기 연민에 빠져 산다. 매기의 나쁜 점이 너무나도 잘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게 나의 나쁜 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매기가 좋아 보였다. 내가 갖고 싶은 삶의 태도이기도 했다. 적당히 모순적이고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윤리적이다. 누군가는 매기의 계획이 수치를 모르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고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할 수 있는 만큼 솔직하고 책임감 있었다. 매기만큼의 실수만 하면서 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 왜 이렇게 힘이 나는지.


그레타 거윅이 연기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보는 내내 시얼샤 로넌이 생각났다. 특히 매기가 "나로 사는 게 지긋지긋해"라고 할 때는 시얼샤 로넌의 조 마치가 스쳐갔다. 그레타 거윅이 감독한 영화들도 아주 좋아하지만, 연기하는 그레타의 모습도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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