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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비 Mar 13. 2024

<패스트 라이브즈> 길 위의 삶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 셀린 송 - 2023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길 위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이민자가 아니어도 많은 현대인들은 이런 생각을 공유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리적 공간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시대임에도 '갈 수 있다'는 것 자체는 떠날 이유가 되지 못한다. 머무르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지만 떠나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주변의 모두가 떠나간다면 머무르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다.


해성에게 나영은 떠나는 사람이다. 열두 살 때도 스물네 살 때도 나영이 먼저 해성에게 작별을 고했다. 열두 살에 좋아했던 여자애를 만나기 위해 뉴욕까지 왔다고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제법 로맨틱하다. 하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는 로맨스가 아니다. 둘은 애틋하고 강렬한 감정을 공유하지만, 그게 한국을 떠날 이유도, 한국으로 돌아갈 이유도 되지 못한다. 이는 노라가 영주권을 위해 아서와 결혼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노라에게 사랑은 목적지가 아니다. 니상도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에 도착하기 위해 이 길을 가는 걸까.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는 내내 삶은 무엇을 선택하든 상관없는 일들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를 따지자면 끝도 없다. 나영의 부모님은 왜 캐나다 이민을 택했을까. 왜 해성과 나영은 스물네 살 때 만나지 않았을까. 노라는 왜 아서를 선택했을까. 해성은 왜 뉴욕까지 왔을까... 너무 많다는 것은 아예 없다는 것과 같다. 모든 일들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뭘 선택하든 상관이 없다. 노라는 왜 아서를 선택했을까? 그때 아서가 곁에 있었고, 말이 잘 통했고, 영주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라와 아서의 사랑이 가볍다는 뜻이 아니다. 누구라도 상관없지만 당신이 좋겠어. 대부분의 관계는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은 사실 너무나도 중요한 나머지 무얼 골라도 상관이 없다.


라는 스물네 살 때 일방적으로 해성에게 작별을 고한다. 열두 살 때와 달리 이는 완전히 노라의 의지다. 한국에 있는 첫사랑을, 12년이 지났는데도 나를 찾던 남자를 내치고, 노라는 뉴욕에서 자리 잡는 것에 집중한다. 원대한 꿈을 안고 미국에 왔을 노라는, 무슨 상을 받고 싶냐는 말에 시원찮게 토니상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됐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고 있는 걸까.


지나온 삶은 마치 전생 같다. 노라의 경우 두 번의 이민을 거쳤기에 이러한 정서적 단절이 더 도드라진다. 성장이라는 건 테세우스의 배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조각내고 버리고 기워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분명 그때의 나건만 다시는 그때의 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를 만나러 뉴욕까지 온 남자에게 사랑을 속삭일 수 없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기에, 그때의 나를 아는 사람들이 더욱 애틋하다. 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 눈물이 터지고야 마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전생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란 언제나 슬프다.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는 내내 천선란의 <사막으로> 속 한 구절이 생각났다. '어느 곳이든 네가 나아가는 곳이 길이고, 길은 늘 외롭단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삶에서 우리는 정착할 곳을 찾는다. 하지만 인생이란 계속되는 것이어서, 우리는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다. 이것은 공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느 것도 붙잡을 수가 없다. 는 늘 무언가를 두고 온 채 나아가야만 한다.


내게는 <패스트 라이브즈>가 조용히 격동하는 삶을 긍정하는 영화로 느껴졌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랑도 하고, 작별도 하고, 꿈을 꾸고, 현실과 타협하기도 한다. 그 모든 건 나쁘지 않고 그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길은 늘 외롭다. 하지만 우리는 길 위에서 어디든 갈 수 있다.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든 그건 개인의 몫이다. 적당히 '외로움을 적재하며'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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