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치즈 마을, 그뤼예르

by 김산결

도린트 블뤼엠리살프 베아텐베르크 인터라켄


융프라우요흐 역에서 인터라켄 동역으로 내려오니 해가 저물어 있었다. 역 맞은편 'Coop'에서 저녁식사 재료를 간단하게 사고 인터라켄 근처 숙소로 향했다. 사실 숙소에 대해서 얘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 호텔에서 바라본 눈 덮인 산과 호수의 풍경을 떠올리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지난 여행 기간 동안 눈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이미 쌓인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숙소로 이동하는 동안 길 옆 쪽으로 펼쳐진 나무와 들판에 쌓인 눈이 달빛에 부서져 장관을 이루었다. 해가 완전히 진 늦은 시간이라 호텔의 외관이나 풍경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달빛에 비친 눈만이 가까스로 보이는 정도였다. 로비에 도착하니 알프스 느낌이 물씬 나는 복장을 입은 직원이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방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분리된 주방을 가지고 있었고, 간접조명으로 꾸며진 침실은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저녁식사와 곁들이기 위해 사온 맥주를 냉장고보다 시원한 바깥에 잠시 두고 마트에서 사 온 재료를 이용하여 스테이크, 파스타, 샐러드 등을 준비했다. 주방이 넓고 도구들도 잘 준비되어 있어서 요리를 하기엔 쾌적한 환경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넓은 식탁에 모여 식사를 하니 하루의 피곤함이 다 녹는 듯했다. 그리고 호텔이 아니라 가정집처럼 꾸며진 곳이기에 마치 우리가 이곳에 사는 사람인 듯한 느낌까지 주었다. 워낙 물가가 비싼 스위스인지라 다소 좁고 불편한 숙소에서 계속 지냈었는데, 그 날만큼은 친구들과 맥주 한 잔에 이런저런 얘기를 곁들여 여유로운 마음으로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가 준비해온 영화를 TV에 연결하여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테라스로 나가보니 난간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밤 사이 눈이 내린 모양이다. 밤에는 테라스로 나가도 찬 바람에 다시 방으로 들어오기 급급했고 워낙 캄캄한지라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바라본 풍경은 전혀 달랐다. 우리가 이렇게 멋진 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테라스 앞으로 펼쳐진 넓은 호수와 호수 맞은편 펼쳐져 있는 하얀 산의 모습을 웅장하지만 동시에 품격이 있었다.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은 장난감 마을처럼 귀여웠고, 웅장한 자연에 압도되어 겸허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코를 스치는 찬 바람은 시원하고 상쾌했고 마음이 정화되는 듯했다. 조금 더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지만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린 그뤼에르 치즈를 먹으러 가는 날이기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외출 준비를 했다.


'도린트 블뤼엠리살프 베아텐베르크 인터라켄'에서 바라본 풍경


그뤼에르로 가는 길


밤 사이 내린 눈으로 인해 도로 곳곳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지난날의 앙상한 가지는 폭신한 하얀 옷을 입고 있었고, 들판, 도로, 돌을 가리지 않고 하얀 눈은 곳곳에 쌓여 있었다. 다행히 길이 얼어있지는 않아 걱정 없이 운전할 수 있었고 우리를 제외하고는 지나다니는 차량도 없어 여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마침 친구가 선곡한 핑클의 'White'를 들으니 겨울왕국과 같은 디즈니의 동화 세상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이 상황에 기가 막히게 잘 맞는 노래였다. 이 순간을 그냥 놓치기는 아쉬워 잠시 차를 세웠고 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도로에 서서 우리의 모습과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그뤼에르로 가는 길


하지만 즐거운 기분은 한순간이었다. 그뤼에르로 가는 길에 두 번의 시련이 있었다. 첫 번째는 눈길이었다. 지리를 전혀 모르는 해외이고 의지할 건 차량 내비게이션뿐이었기에 우리는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로만 따라갔다. 한동안은 포장된 길로 달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길이 사라졌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하얗게 쌓인 눈길에 바퀴 자국을 처음 새기며 계속 길을 따라갔다. 길은 점점 언덕으로 향했다. 산까지는 아니었지만 꽤나 높은 언덕이었다. 아마 저 언덕을 넘어가는 길이 그뤼에르로 가는 빠른 길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언덕길에 펜스가 전혀 없었고 포장된 길이 아니라 눈으로만 덮여 있었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잘못 밟았다가는 차가 언제 미끄러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함께 간 친구들 모두가 운전에 꽤나 자신이 있는 친구들이었고, 그중에서도 운전을 잘하는 친구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긴장한 상황이었고 친구 역시도 자신이 지금까지 운전한 것 중 가장 위험한 순간인 것 같다고 했다. 말 그대로 기어가는 속력으로 최대한 안전하게 언덕을 올랐고 무사히 그 길을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찔한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된다. (또 한 번의 순간은 이탈리아에서 맞이하게 된다.)


그 길을 벗어나고도 한 참 동안 시골길이 계속되었다. 우리를 제외하고 지나가는 차량은 전혀 없었고, 계속해서 첫 발자국을 남기며 그뤼에르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긴급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기름이 없었다. 기름만 없었다면 다행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에는 주유소가 없어 보였다. 그뤼에르까지는 한참이나 더 가야 했고, 이미 차량 계기판에는 주유가 필요하다는 안내등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가는 이 길에 주유소가 있기를 간절히 비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달려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큰일이 나는가라는 생각이 들려던 찰나 앞쪽에 슈퍼마켓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무심결에 지나칠 뻔했지만 마켓 옆으로 주유기계로 보이는 작은 박스가 보였고 그 즉시 급하게 차를 돌렸다. 기름값이 적힌 안내판도 주유소라는 간판도 전혀 없었지만 기계에 적힌 'DIESEL'이라는 단어와 옆에 걸려있는 주유노즐을 보니 기름을 넣는 곳이 확실했다. 이곳이라면 기름이 아무리 비싸더라도 넣을 수밖에 없었다. 기계를 사용하는 데에도 조금 애를 먹었지만 다행히 주유를 하고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여러모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뤼에르의 치즈는 우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덕분에 우리는 더 즐거운 마음으로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아찔했던 언덕 길과 고마운 주유 기계


그뤼에르 치즈


우여곡절 끝에 그뤼에르로 도착했다. 그뤼에르는 치즈로 유명한 스위스의 작은 마을이다. 스위스에서는 치즈 요리를 꼭 먹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기왕 먹는다면 제대로 된 곳에서 먹고 싶은 내 바람으로 인해 정해진 여행지이다. 아마 당시만 하더라도 이 작은 마을은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또한, 대중교통으로 오기는 어려운 곳이라 더욱 관광객들이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렌터카 여행은 장점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다. 기차나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곳이라도 가고 싶다는 마음과 도로만 있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맛있는 치즈를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뤼에르로 향한 것이다.


관광객들이 많지 않은 지역이고 더군다나 여행 비수기인 시기라 마을은 한산했다. 작은 언덕에 위치한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마을 내부도 소박한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어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전형적인 중세 도시였다. 마을을 둘러보기 전 배가 많이 고팠기에 우선은 식당으로 향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인 '샬렛 드 그뤼에르(Restaurant le Charlet de Gruyeres)'로 갔고 하이디가 입을 법한 복장의 웨이트리스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여담이지만 스위스로 오기 전 여행책자에서 스위스의 언어생활에 대해 읽은 기억이 있었다. 스위스는 다른 나라들로 사방이 둘러 쌓여있기 때문에 지역마다 주변 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언어 또한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위스 북부는 독일어에 가깝고 서부는 프랑스어 남부는 이탈리아어에 가깝다는 내용을 보았다. 이 얘기를 꺼내게 된 이유는 책에서 본 내용을 이곳에서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웨이트리스의 복장도 프랑스 전통 의상에 가까웠고 직원들끼리는 불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비록 스위스에 있었지만 그리고 프랑스를 가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의 시골 마을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느낌이었다. 스위스에서 프랑스를 느끼는 1석2조의 기분이 들었다.


나무 건물로 된 식당의 분위기는 따뜻했다. 창에는 마치 할머니가 만들어준 듯한 커튼이 걸려있었고 식당 곳곳이 화분으로 꾸며져 있었다. 안내받은 테이블에는 귀여운 젖소와 마을의 풍경이 그려진 테이블 매트와 아기자기한 접시와 포크 그리고 나이프가 놓여 있었다. 메뉴는 빵, 베이컨, 햄, 감자 등을 치즈에 찍어먹는 퐁듀와 치즈를 녹여 똑같이 빵 등에 곁들여 먹는 라클렛으로 주문했다. 퐁듀는 한국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지만 라클렛은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큰 기대가 됐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잠시 포토타임을 가진 후 바로 맛을 보았다. 사실 특별한 음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 베이컨 등에 치즈를 곁들여서 먹는 것뿐인데도 치즈의 고소함으로 함께 곁들이는 음식들이 풍미가 배가 되었다. 별거 아닌 감자인데도 더욱 고소하게 즐길 수 있었다. 라클렛은 치즈를 녹이는 방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요기가 될 뿐만 아니라 치즈를 직접 긁어먹는 즐거움도 있었다. 직원분들도 이방인들에게 무척 친절하여 기분이 더욱 좋았다. 식사를 마치니 마지막으로 커피와 초콜릿이 나왔고 완벽한 식사에 걸맞은 마무리였다.


즐거운 마음으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서려고 보니 출입구 쪽에 방명록이 있었다. 우리가 여기에 왔다는 흔적을 남기고 아름다운 식당 외관을 배경 삼아 사진을 남겼다. 이 마을에서는 가장 유명한 곳임을 증명하듯 근처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엽서에도 이 식당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먹은 것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음식이었다.


샬렛 드 그뤼에르(Restaurant le Charlet de Gruyeres)의 퐁듀와 라클렛
샬렛 드 그뤼에르(Restaurant le Charlet de Gruyeres)


그뤼에르(Gruyeres)


식사를 마치고 마을을 잠시 둘러보았다. 작은 중세마을에는 주 도로를 제외하고는 눈에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마을 주변에는 성벽이 둘러쌓고 있었다. 그렇기에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구석구석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주변에 높은 산이 없고 마을 자체가 언덕에 자리 잡아있었기 때문에 스위스의 설원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있었다. 또한, 관광객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잘 보존된 성벽과 탑에도 직접 올라가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위로 소복이 쌓인 눈으로 그 경치는 더욱 아름답게 다가왔다. 북적북적한 관광지를 벗어나 조용한 마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이었다. 마을 곳곳에서는 지난 크리스마스의 흔적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큰 마을은 아니었기에 성벽 이곳저곳에 추억을 남기고 초콜릿 공장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향했다.


그뤼에르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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