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동안 정들었던 로마를 떠나 토스카나 지역의 여러 소도시들을 구경하기 위해 출발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시작으로 계속 남쪽으로 내려왔던 우리의 여정의 방향을 정반대인 북쪽으로 바꾸는 반환점이었다. 원래는 자동차로 이탈리아 남부 도시인 나폴리까지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거친 이탈리아의 운전문화와 나폴리의 절벽 도로를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 여행 도중 갑작스럽게 모든 일정을 변경하게 되었다. 예약해두었던 숙소들을 꽤 큰 수수료에도 불구하고 모두 취소했고, 새로운 일정에 맞춰 숙소를 새로 찾아보았다. 수수료를 기꺼이 지불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스트레스는 큰 상황이었다. 어쨌든 로마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시 북쪽으로 향했고, 시기는 조금 앞당겨졌지만 이미 여행을 하기로 계획했던 토스카나 지역의 소도시들을 향해 출발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서는 여러 형태의 자연경관을 볼 수 있었다. 넓은 초원과 초원 위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양이나 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샌가 광활한 포도밭이 주변을 가득 매우고 있다. 실제로 토스카나는 유명한 포도주의 산지이며, 키안티, 몬탈치노, 몬테풀치아노와 같은 품질이 높은 와인으로 유명한 도시 및 지역이 있다. 토스카나 지역에 초원과 포도밭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운전을 하다 보면 눈치채지 못하게 언덕을 오르고 있고 어느샌가 지평선 너머로 가득한 산맥들과 그 반대편 산맥에 올라와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런 매력이라면 토스카나 지역이 과거 자연환경, 역사, 예술적 유산, 문화 등 이탈리아 전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토스카나에서의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사투르니아 토스카나주 그로세토도의 도시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시 자체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에 있는 노천온천이 목적지였다. 사투르니아의 노천온천은 2015년 당시 JTBC 프로그램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이탈리아 편에서 소개된 곳으로 여행객들에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이 온천은 천연유황온천으로 온천을 관리하는 상업기관이나 단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개방된 곳이다. 온천이 탄생한 배경도 '자연'에 의한 것이지만 이 온천이 운영되는 방식이야 말로 '자연' 그대로인 것이었다. 또한, 유황온천이라는 특징으로 온천물의 색이 불투명하고 마치 물에 우유를 탄듯한 뽀얀 색을 띠고 있다. 이렇듯, 우리에게 사투르니아 노천온천은 개방적이고, 친환경적이고, 진입장벽이 없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차가 없으면 쉽게 갈 수 없는 특별한 곳이었기에 여행지 목록에 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사투르니아 노천온천에 도착하니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라곤 온천에 대한 간단한 안내판과 떠돌이 개뿐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별도의 주차공간도 없었기에 온천 인근에 임의로 주차를 해야 했다. 온천 안으로 입장하니 더욱 꾸밈이 없었다. 무료로 개방되는 장소이기 때문에 별도의 관리자가 없었고 온천 구역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니 달걀 썩은 냄새라고 흔히 불리는 지독한 유황 냄새가 온 사방에 퍼져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추운 날씨인지라 온천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성별을 떠나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공유하는 온천이기 때문에 수영복이나 간단한 옷가지를 걸치고 온천을 즐겨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속옷만 입고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말 그대로 자연이 만든 온천이기 때문에 별도의 탈의 공간도 없었다. 우리는 커다란 담요로 시야를 잠깐 가리고 한 사람씩 순서대로 급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본격적으로 온천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
한국의 목욕탕처럼 온천물이 뜨겁지는 않았지만 온 몸을 은은하게 따뜻하게 해주는 온도가 나는 더 좋았다. 하지만, 코 끝을 찌르는 유황 냄새는 사실 끝까지 잘 적응이 되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 날 이후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몇 번을 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수영복에는 유황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정도로 지독한 유황 냄새였다. 피부에 좋다는 유황의 효능을 생각했을 때 유황의 향이 강하다는 것이 성분이 더 강하다는 뜻이라면 오히려 이득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그래도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머리는 상쾌하게 시원하지만 몸은 나른하게 따뜻한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이 자연이 만든 노천온천의 매력은 온천물 자체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이 높은 지역에서 흘러내려 보내준 물로 인해 이 곳의 지형이 변형이 되었고 우리가 지금 보는 모습은 위 사진처럼 마치 계단 형태의 모습을 띄고 있다. 이러한 온천의 형태와 모습도 사투르니아 노천온천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이 만든 계단 형태가 마치 온천탕을 나누어 놓은 듯했고 가장 높은 탕에서부터 가장 낮은 곳까지 이동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매력이었다. 큰 차이는 없겠지만 하류로 갈수록 물 온도가 조금 낮아지는 것은 마냥 기분 탓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피부로도 즐기지만 눈으로도 즐길 수 있는 형태가 이 곳을 다른 노천온천과는 다른 특별한 장소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날씨도 쌀쌀하고 다음 일정도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곳에서 온천 외에는 크게 할 것이 없기에 한 시간가량 온천을 즐기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토스카나는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여러 마을들이 유명하지만 우리는 그중에서도 몬테풀치아노라는 마을을 들리기로 했다. 몬테풀치아노 역시 와인으로 매우 유명한 마을이며, 이곳 품종인 몬테풀치아노 포도로 만든 와인을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라고 불린다. 나와 친구들은 와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유명하다는 와인을 직접 먹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몬테풀치아노에서의 가장 우선 목적은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음식에 와인을 곁들여 먹는 것이었다.
몬테풀치아노는 마을 자체로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중세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어있었고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촘촘히 모여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을 내부에는 이런 마을과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작은 자동차들이 많이 주차되어있었고 길에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용한 이 마을에 뭔가 마음이 많이 갔다. 또한, 언덕 위에 조성되어있는 마을이다 보니 계단이 꽤 많이 있었는데 오히려 이러한 계단 덕분에 마을 구석구석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는 미리 찾아놓은 'La Bottega del Nobile'라는 레스토랑을 찾아갔고 잘생긴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한국에서도 식당에서 와인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믈리에가 와인을 어떻게 준비하고 손님들에게 대접하는지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일하던 카페에서 사장님께서 하시는 것을 본 적은 있었지만 소믈리에 자격을 가지신 분은 아니셨기 때문에 정석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말은 즉슨 나와 친구들은 모두 인생 처음으로, 심지어 이탈리아에서 전문 소믈리에의 대접을 받은 것이고 더군다나 한 가지 이벤트로 인하여 이 기억은 나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웨이터이자 소믈리에인 레스토랑의 아주 미남의 직원께서 우리에게 식사 메뉴판과 와인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식사 메뉴로 피렌체에서 큰 실패를 맛보았던 티본스테이크를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식사 메뉴를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와인을 고르기 위해 와인 메뉴판을 보니 식사 메뉴보다 많은 와인 리스트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우리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이 중에서 하나의 와인을 선택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직원계 도움을 청하기로 했고 우리가 원하는 가격대를 얘기하고 식사 메뉴인 스테이크와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받았다. 그렇게 주문을 하고 와인과 음식이 나오기까지 잠시 기다렸다.
잠시 후, 미남의 소믈리에께서 우리가 주문한 와인과 와인잔 그리고 디켄터를 카트에 싣고 우리 테이블로 왔다. 그는 유려한 손놀림으로 코르크 마개를 땄고 와인의 신선도를 확인하기 위하여 코르크 마개의 향과 상태를 확인했다. 한순간 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코르크 마개에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을 확인한 것처럼 보였다. 이후 그는 와인잔에 와인을 조금 따르고 가볍게 잔을 돌리며 디캔팅을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본인이 먼저 맛을 보겠다고 했다. 와인을 맛을 본 그는 한순간 인상을 썼고 다시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에게 사과를 구했다. 와인 상태에 문제가 있어서 새로운 병으로 바꿔오겠다고 그는 말했다. 짧은 순간 와인을 확인하고 손님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구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전문가의 모습 그 자체였다. 아마 우리는 그 잘못된 와인을 먹었어도 맛의 차이를 몰랐을 것이다. 소믈리에는 자신의 일을 충실히 수행한 것뿐이겠지만 오히려 그의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는 이 식당과 직원들에 대한 신뢰감과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그는 새로운 와인의 마개를 다시 열고 맛을 본 후 이상이 없다며 우리에게 한 잔씩 와인을 따라주었다. 이후, 우리가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고 우리는 이탈리아에서의 가장 만족감이 높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사실 와인의 맛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와인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된 지금 마시면 그 차이를 알 수 있겠지만 그때 당시 우리에게는 와인은 그저 와인이었다. 하지만, 우리를 대하는 그 소믈리에의 모습에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식당에 대한 좋은 이미지, 분위기, 심지어 몬테풀치아노라는 마을에 대한 이미지는 행복한 모습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성공적인 점심식사를 마치고 숙소가 있는 다음 마을로 이동하니 점점 해가 지기 시작했다. 겨울 해는 한국도 이탈리아도 섭섭한 마음이 들 정도로 빨리 졌다. 이곳에서 머무는 숙소의 형태는 이전과는 다른 특별한 형태였다. 이탈리아어로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 영어로는 'Farm Stay'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런 숙소의 모습 쉽게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민박과 비슷하다. 다만, 일반적인 민박이 아니라 토스카나 지역의 농가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농가민박이라고 할 수 있다. 토스카나 지역은 포도 아니라 다양한 농작물과 돼지, 양, 소 등 가축을 키우는 농장이 있고, 이러한 농장에서는 관광객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자신들의 농가 건물 일부를 숙소로 제공하고 있다. 우리도 이러한 아그리투리스모 중 한 곳을 예약했고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지내보지 못한 큰 주택 건물에 입실하게 되었다.
건물 내외부가 좋았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시골 아저씨의 푸근한 인상도 좋았고 이 곳을 둘러싸고 있는 토스카나의 자연경관이 무엇보다도 가장 좋았다. 밤이 되니 별이 쏟아질 듯 떠 있었고 주변은 고요했다. 저녁 식사를 분주히 준비하는 우리의 소리 외에는 모두가 잠들어있는 듯한 저녁과 밤이었다. 친구들과 하루를 마무리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리조또, 파스타, 피자 등 음식을 준비했고 미리 사두었던 맥주도 함께 했다. 간접등이 가득한 토스카나 농가의 건물은 그 자체로 따뜻했다. 이탈리아에 처음 들어와 로마까지의 여정이 녹록지 않았다. 이탈리아 여행을 후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토스카나의 하루가 이런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화려한 대도시와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곳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마음 편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아마 이 곳에서의 일정을 좀 더 길게 가져갔을 것이다. 아쉽게 다음 날 바로 베네치아로 이동해야 했지만 아쉬움이 있기에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란 생각을 하며 친구들과 도란도란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