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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Feb 16. 2021

15. 술술술

왠지 모를 기분을 내는 음료

 술. 19년간 미성년자로 살면서 엄격히 금지당했던 것. 유흥의 상징처럼 여겨지며 철저하게 거리를 두어야 했던 술은 20살의 날이 밝음과 동시에 내 곁으로 왔다. 싱거울 정도로 쉽게 허락되어서인지, 성인이 되어 처음 먹어본 술은 그리 어른스럽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았다.


 2021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새벽, 잉크도 번지지 않은 주민등록증을 들고 편의점에서 소주와 맥주를 샀다. 언니와 함께 들뜬 마음으로 달그락거리는 병을 들고 집으로 향했던 그때, 차갑게 눈이 맺힌 밤공기마저 홧홧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방으로 술을 나르고, 꽤나 본격적으로 상을 준비해 언니가 타 준 소맥을 마셨다. 20살이 되어 난생처음 합법적으로 마셔본 술은 아니나 다를까 쓰고 화한 맛이었다.


 이걸 왜 마시나 싶은 의구심은 처음이라는 설렘으로 덮어두고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였었다. 한두 시간쯤 지나자 내 몸을 지탱하는 요소들이 하나 둘 증발해갔다. 균형감각과 이성, 감정조절 능력 등이 알코올 향과 함께 공기 속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마음속에 얹어두었던 것들이 비어져 나왔다. 때를 가를 것 없이 웃음이 나왔고, 몸은 스스로를 가눌 의지를 잃을 채 기울었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휘청거리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던, 당시엔 한심하다 생각했던 사람들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새벽에 곯아떨어진 뒤, 살면서 처음으로 숙취라는 악몽과 함께 아침을 맞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픈데, 입과 목은 뻑뻑할 정도로 바싹 말라있는 느낌. 화학 물질을 한껏 들이부은 것의 업보라고 스스로를 타박하며 힘겨운 다음 날을 보냈다. 오후가 될 때까지 음식을 먹지 못하고 내내 잠을 자야 했던 그 날, 다시는 술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지냈다. 술집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는 친구들을 불편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길거리의 취객들을 피하며 진저리를 쳤다. 술을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에 박차를 가하며 알코올의 ㅇ자도 꺼내지 않는 하루들을 보냈다.


 그러다 유난히 바쁘게 할 일을 끝내고 고단한 몸을 이끌어 집으로 향하던 어느 날, 문득 술이 생각났다. 술이 필요했다기보다는 그냥 술이 가진 관념적인 이미지가 떠올랐다. ‘퇴근 후 맥주 한 잔’ 따위의 문구들이 머릿속을 에워쌌다. 결국 충동적으로 맥주 한 캔을 사고 집에 돌아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넷플릭스에서 안줏거리를 뒤지다가 결국 항상 보는 뻔한 로맨스 드라마를 틀어놓고 멍하니 맥주를 마셨다.


 그때의 술은 미묘한 맛이었다. 왠지 모르게 후련한 기분을 냈다. 내가 하루 동안 짊어져야 했던 것들을 강제적으로 털어내는 듯했다. 내 고단함을 모두 씻어내는 맛은 결코 아니었지만, 피곤한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내 감정과 웃음의 조절 덮개를 떼어낸 듯한 감각이 돌아왔다. 실없이 피식거리며 술을 홀짝이다가 자연스럽게 몸을 뉘이고 잠을 잤다. 얼마 마시지 않아서인지 다음 날은 그리 고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허한 기분이었다.


 왜 술을 마시는지, 에 대한 답을 찾기엔 내가 오랫동안 술을 마신 사람도, 술을 즐기는 사람도 아닌지라 쉽게 답하진 모르겠다. 다만 왜 사람들이 종종 술에 기대고 싶어 하는지는 조금 알 듯하다. 스스로 내려놓을 수 없는 부담과 억눌러야 하는 감정들이 범람하는 후련함을 가끔은 바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매일 같이 술을 찾거나 힘들 때마다 술에 의지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람들은 동정할 가치가 없다는 데에도 한치 흔들림이 없다. 술을 찾았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이 통제 불능의 상태에 다다르게 한 것 또한 무절제한 자신이라는 것도 명확한 사실이니까.


 술은 묘한 음료다.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내려놓게 만들고, 삶의 고단함을 잠시 망각하게 만든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을 수 있을 법한 후련한 맛을 낸다. 하지만 그 한순간의 후련함은 지나고 나면 허전함으로, 외로움 등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술을 마시되 술에 먹히지는 말라, 모든 사람들이 너무 많이 술을 찾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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