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 Feb 14. 2021

14. 일단 해보자

모, 아니면 말고.


“일단 해보자!”


 이 말은 아마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내뱉은 말 중 하나일 것이다. 얼핏 보면 넘치는 자신감과 자기 확신에서 오는 다짐처럼 보이지만, 저 말을 할 때 나는 주로 이성적인 사고를 포기한 상태다. ‘일단’이라는 말에서부터 전후 정황과 가능성을 따져보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내걸고 있으니 말 다 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들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모를 때. 내 능력과 벌여놓은 일의 해결 가능성 사이를 가늠할 때 나는 유독 무모해진다. 그 간극이 아무리 커 보이더라도 내 손 안의 일을 포기하기 싫다는 욕심이 이성을 앞선다. 내가 바라는 이상과 나에게 주어진 책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 그중 어느 하나도 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접기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에 대한 집착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른다. 언젠가 그 근원에 대해 고민해보며 한결같았던 호기심과 인정 욕구 정도를 시작점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다만 정확한 요소는 이런 방식으로 살아오며 얻은 성취감들이 나를 무척이나 단단해지게 만들었다는 것. 또 선택의 갈림길에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던 순간들이 꽤나 뼈아픈 후회로 남았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20살. 성취와 실패, 후회 등 온갖 산전수전을 겪었다기엔 어린 나이다. 물론 나도 내가 그리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고 감히 내뱉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바꾸어놓을 만큼 뇌리에 깊게 박힌 일들이 적다고도,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았다며 타박할 나이지만, 그 사이 내겐 두 손으로도 차마 꼽을 수 없는 시간들이 있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는 대로, 친구들 사이에서 튀지 않는 대로, 굳이 큰 결심과 책임감 따위 필요하지 않은 순탄한 하루를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림과 글은 취미로 하라는 부모님의 말에 낙심하면서도 약간의 반항심으로 온갖 청소년 백일장에 참가하곤 했던 때. 내가 쓰는 글과 그림이 멋지다고, 꼭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쓰라고 응원해주신 한 선생님의 말씀을 딛고 머리를 부유하던 문장으로 밤을 수놓았던 때.


 그런 때도 있었다. 아침 여섯 시 반에 일어나 등교를 하고 11시가 넘어서야 하교한 뒤, 새벽 2시까지 발표 포럼의 보고서를 작성했던 때. 독립 영화 촬영장에서 스태프로 일해보기 위해 야자를 째고 꽉 막힌 만원 버스에 몇 번이고 몸을 실었던 때. 몸살이 났으면서도 내가 기획한 해양 환경 정화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2-3시간 동안 더러워진 바다의 쓰레기를 주웠던 때. 코로나로 학교에 갈 수 없어 독서실에서 온종일 공부하면서도 틈틈이 일상 만화를 그려 올리던 때.


 하루 평균 4시간 남짓을 자면서도 무작정 하고 싶은 일에 매달렸다. 학생으로서 놓을 수 없었던 공부와 하고 싶은 활동을 병행하기 위해 몸을 깎아가며 노력이라는 걸 했었다. 속수무책으로 건강과 체력을 잃었던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더할 나위 없는 충만한 시간을 살았다.


 물론 매 순간마다 성공과 성취를 거머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했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로 흐지부지 끝나버린 도전도 많다. 다만 그 일들은 나를 살아가게 했다.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책임져야 했던 의무로 가득 찼던 시간들 사이, 내가 갈망하며 열정을 쏟아냈던 일들이 있었기에 숨을 쉴 수 있었다. 성공은 값진 결과였지만, 그를 얻지 못했다고 좌절할 여유 따위 없었다. 내가 선택하고 도전한 일 없이 나를 가치 있게 채울 수 있는 것을 아직 찾지 못했기에.


 모 아니면 말고. 성공과 실패로 기준을 세우는 사회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나는 조금 무모 해지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원하지 않는 삶에서 바라는 일에 몰두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지. 거창하지 않게 흘러간 하루를 작은 글로 밝히며 또 한 번 오늘을 마무리한다.


작가의 이전글 13. 설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