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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Feb 12. 2021

13. 설날

각자의 자리에서 안녕을 빌어요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부터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먼 친척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 2월 12일 오늘은 민족 대명절인 설날이다. 원래대로라면 맛있는 음식과 반가운 사람들이 북적이는 오늘이 이토록 조용한 것은 실로 이례적인 일이다. 말 그대로 ‘풍요로움’이 넘치던 날이 하나의 질병으로 증발해버린 기분은 한편으론 허전하고, 한편으론 조금 후련하다.


 우리 집은 6명의 식구가 있는 대가족이다. 게다가 부모님도 각각 넷과 다섯의 형제와 함께 자라셨기에 각종 제사나 명절이 있는 날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리곤 했다. 부엌은 음식 냄새와 안부를 묻는 들뜬 목소리로 가득 찼고, 안방은 TV 소리와 서로 자신이 보고 싶은 채널을 틀겠다는 소리가 울렸다. 거실과 너머의 제삿방까지 사람들이 상을 펴고 앉아 식사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성을 높이며 나누는 대화 소리가 집안에 퍼졌다.


 음식도, 사람도, 말도 많은, 모든 게 많다 못해 흘러넘치는 날. 아직 내가 집을 떠나 본 적이 없고, 삶의 대부분을 집의 분위기에 종속된 자녀로 살았기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개 나는 이 범람하는 풍요가 부담스러웠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라서도 있지만, 그 풍요의 뒤에 어떤 고단함이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틀에 걸쳐 음식 준비와 상차림을 도우는 일. 얼굴도 잘 모르는 친척들에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하는 일. 안부랍시고 묻는 무례한 질문에 겸손하게 대답하는 일. 나와는 비교되는 친척의 성공담을 애써 경청하는 일. 다들 먹고 일어선 상을 정리하는 일. 이는 명절의 충만함으로 가리기에는 무리가 있는 노고였고, 나만 일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로도 삐딱해진 나를 돌려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신년의 기쁨을 누리기보다 댓 발 튀어나온 불만을 달래기 바빴던 날. 내게 설날은 그런 하루였다.   


 그런 점에서 올해 설날은 참 신기한 날이다. 각지로 흩어진 가족조차 다 모일 수 없다는 점은 당황스럽지만, 육체적‧정신적 소모감 없이 안온한 명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다.


 느지막이 일어나 간단하게 차려진 점심을 먹고, 설 특선 영화를 보며 게으르게 글을 쓴다. 평소의 설날이었다면 가당찮았을 일이 쉽게 오늘을 채운다. 모두 모이진 못했지만 여전히 소중한 가족들과 보내는 설날은 평소보단 조용하지만 굉장히 평화롭다. 반가움에 달뜬 공기 위를 부유하던 예전보다 느릿히 흘러가는 시간을 곱씹는 오늘이 나는 좀 더 마음에 든다.


 다만, 만일 내가 홀로 살아오며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진 사람이라면, 올 설날은 사람을 만날 핑곗거리로도 쓸 수 없는 가혹한 하루였을 것 같다. 고향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외딴 삶의 궤도를 그려가는 사람들. 그런 이들에겐 가족이 그립다는 감각도, 북적이는 주변이 그립다는 느낌도 느껴본 적 없는 한낮 20살의 철없는 글이 꽤나 거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오늘은 부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안녕을 빌어야 한다. 그토록 보고 싶은 가족들을 위해, 꼭 만나고 싶은 그리운 친구들을 위해.


 여태껏 온 가족이 한데 모여 행복한 한 해를 빌었던 오늘은 설날. 같은 시간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오늘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은 날이었길, 각자의 고요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던 낯선 하루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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