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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Feb 18. 2021

16. 어긋난 맥시멀 리스트

의도치 않은 미련의 잔재

 간결하고 깔끔한 것을 추구하는 요즈음의 트렌드, 미니멀리즘. 나는 정확히 그 반대의 부류인데, 사소한 종이 조각 하나 맘 편히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욱여넣는 버거운 사람이다. 미니멀리즘의 반대라고 하면 맥시멀리즘이 통상적으로 생각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멕시멀리즘의 축에도 낄 수 없다. 맥시멀리즘도 나름의 예술이라, 물건을 쌓아두기만 한다고 그 예술의 격에 발을 들여놓을 순 없는 것이다. 내 공간은 예술의 파편이라기보다는 미련에 점철된 타임캡슐에 가깝다.


 이전에도 종종 물건에 대한 집착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가 돌아보는 수준이라면 지금은 뉘우치고 있달까, 참 많이 반성하는 중이다. 20년 만에 고향을 떠나 타지의 기숙사로 들어갈 것이 결정된 지 약 2달. 그 2달을 안일하게 살아오다 입주가 D-3으로 다가온 지금 이에야 나는 부랴부랴 짐을 걷어내고 있다. 떠났다가 '돌아올'것이 예정되지 않은, 정말 방을 빼고 집을 나가는 상황이기에 나는 난생처음의 규모로 물건들과 이별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득 모아 온 편지, 수학 문제와 풀이가 빼곡히 적혀있는 몇 권의 풀이노트, 어렸을 때 종이로 엉성하게 만든 옷 입히기 인형부터 인체 크로키 연습까지 온갖 그림이 모여 있는 스케치북 열댓 권. 입시가 끝난 뒤 수십 권의 문제집과 참고서를 버렸음에도 내 책상 위에는 각양각색의 책과 종이들이 수북이 꽂혀있었다. 비단 책뿐일까, 연필꽂이에 수북이 꽂혀있는 필기구들(안 나오는 것도 다수 섞여있는)이 책상 한편을 차지하고 있고, 서랍을 열어보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존재의 여부조차 잊어버렸던 것들과 마주하는 경험이란 정말이지. 끔찍했다.


 그놈의 수집 본능. 모으는 건 모을 대로 모으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버리지는 않는 게으른 사람의 최후는 뻔했다. 물건에 둘러싸여 공간이 아닌 물건의 집합에 얹혀사는, 그야말로 호더*로서의 결말을 맞는 것이다.

*호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강박적 축적 증세를 보이는 사람.


  내가 물건을 지나치게 모아두며 내세운 명분은 '추억'이었다. 작은 편지만 해도, 다시 꺼내어 읽어봤을 때 그 순간이 생각나고 편지를 전해준 친구의 마음이 다가오며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오늘 편지들을 정리하면서도 뿌듯하고 행복한 감정을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동시에 부담감이 와 닿았다. 낡고 헤져 보풀이 인 종이 조각들 하나하나에 추억이라는 이름을 붙여 잡아두기엔 이미 곱씹기에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들이 많았다.


 다른 물건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전 그림들을 추억한답시고 모아둔 스케치북들과, 수년간 모아 온 공연 팜플랫과 영화 포스터들은 정말 두 말할 것 없이 소중했다. 마치 그걸 버리면 그 순간의 기억과 감상이 사라져 버릴 것처럼 불안했고, 결국 하나 둘 남겨두다 보니 손을 대기 힘들 정도로 쌓여갔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복과 추억을 기억하기 위해 남겨두었던 것들로 인해 현재의 나는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나는 달라, 내 물건들은 모두 의미를 가지는 소중한 것들이야'.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손을 잡고 다시 생각해보라 권하고 싶다. 나도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래 버린 수많은 물건 중에 무의미한 것들은 거의 없었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으면 있었지 아무런 이유 없이 내 공간에 입주했던 것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 물건이 의미를 가지느냐가 아니라, 내가,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그 물건을 수용할 수 있는지이다.


 '나'와 공간에 대한 인식 없이 물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가다 예쁜 조약돌이 보이면 끊임없이 주머니에 집어넣는 행동과 다를 바 없다. 처음 한 두 개는 기분도 좋고 소중한 것으로 채워진 주머니가 뿌듯하겠지만 시간이 지나 지나치게 많은 돌을 줍다 보면 주머니가 찢어지는 것은 물론 걸어 다니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나와 같이, 미련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맥시멀 리스트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삶과 행복, 추억의 기준을 물건에 맞추지 말자. 그 물건이 없어도 우리의 하루는 잘 굴러가고, 때론 그 물건이 없을 때 더욱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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