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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Feb 20. 2021

17. 입주 여정기

처음 겪는 종류의 험난한 여정

 미리 예고하겠지만 오늘은 글이 꽤나 짧을 것이다. 그림도 없다. 오늘 찍은, 의미가 불분명한 사진으로 대체할 거다. 그 이유에 다양한 여구를 붙이고 싶지만 오늘은 정말 힘이 없다. 살면서 처음 겪는 종류의 고난에 부딪혀 헤롱 거리는데 하루의 에너지를 다 써야 했다. 단순히 말하자면, 독립을 했고, 기숙사에 입주했다.


 독립에 대한 진지한 감상은 다음에 풀 것이다. 감상에 푹 젖어 글을 쓰는데 최적화된 감상적 인간으로서 꽤나 이례적인 선언이다. 진지해질 힘도 없이 내 상태가 고갈되었다는 것의 증거이기도 하다.


 입주 여정의 시작은 새벽이었다. 타지에 가서 혼자 산다는 것의 두려움과 기대감이 엄습했던 전날 밤, 나는 새벽 3시까지 밤을 새웠다. 고향 집에서 자는 최후의 밤인 것만 같았고, 다음 날이 걱정되어 도무지 잠을 청하지 못했다. 결국 여느 밤처럼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의 애플리케이션 사이에서 유영하며 시간을 보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침 7시 반에 일어났을 때의 에너지를 당겨 쓴 셈이다.


 결국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뭔가 머리의 고정핀 하나가 나가 있었다. 그게 이성적 사고였는지, 침착함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공항에서의 내가 굉장히 두서없었다는 것만은 기억이 난다. 합쳐서 총 39kg이었던 어마 무시한 짐을 부치다가 갑자기 가방 속의 노트북이 깨질 수 있다는 생각에 공항 카운터 바닥에서 급히 짐을 풀었다. 엉망으로 섞여있는 짐들을 헤치고 노트북을 구해낸 뒤, 다시 마구잡이로 짐을 구겨 가방을 닫았다.


 어찌어찌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이미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새벽의 여파가 덮치듯 몰려왔고, 따뜻한 공기와 어수선한 비행기의 소음은 졸음이 밀려오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렇게 눈을 반절 감고 졸다가, 안전벨트를 차는 것을 잊어버린 채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움직이는 진동에 정신을 차리고 안전벨트를 맸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고 한심하다.


 공항에서 기숙사로 오는 길도 평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차가 막히는 걸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곁에 나무가 가득한 일차선 도로를 굽이굽이 달려야 했다.


 도착하고, 20분 정도를 꼬박 대기하다 짐을 이고 들어온 방은 생각보다 작았다. 1년을 함께 지낼 룸메이트는 이미 방에 도착해 있었다. 물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한테는 오늘 내로 정리해야 하는 39kg의 짐이 있었으니까. 결국 처음 서로를 인지했을 때의 어색한 인사 빼고 꼬박 1시간을 쭉 정리만 했다.


 이불부터 옷, 필기구까지 온갖 물건들을 다 정리하고 쓰레기까지 야무지게 분리수거를 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정확히는 답장을 했다. 쌓여있는 연락들을 방치하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으나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바빴으니까. 고맙게도 친구들은 따뜻한 응원과 연락 좀 자주 하라는 잔소리를 동시에 안겨줬다. 이쁜 놈들.


 오랜만에 즐겁게 연락을 하고, 잘 살 수 있다는 격려를 한가득 받고 난 뒤에야 오늘의 글을 쓴다. 원래대로라면 어제 이미 글을 완성하고 지금쯤 그림을 그리고 있어야겠지만, 짐을 쌀 때 노트북을 먼저 챙겨버려서 어제는 꺼내지 못했다. 사실이고, 변명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이곳을 집이라고 부르겠지. 우리 집이 아닌, 내가 사는 나의 집. 이곳에서 내가 행복하길,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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