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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Jan 29. 2021

1. 솔직하지 않으면

'나'는 거대하게 포장할수록 초라해졌다.

 "글에 여러 가지 미사여구를 쓰는 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장담컨대 정말로 솔직해지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한 글자도 쓸 수 없을 거예요."


 어느 명언집에서 따왔을 법한 저 거창한 대사는 2020년,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반강제적으로 참석한 자기소개서 특강에서 들은 말이다.  조용한 강당에서 열을 맞추어 앉아 몇 시간이고 들었던 특강의 내용은 이제 한 줄도 기억나지 않지만, 흘러가듯 등장한 저 말은 아직까지도 종종 내 머릿속을 후벼 파곤 한다.



 어렸을 때를 많이 기억하는 편은 아니지만, 내 회상 속 어린 나는 항상 칭찬에 목마른 아이였다. 그림 그리기 시간에는 꼭 선생님을 초롱초롱 바라보며 잘 그렸다는 칭찬을 받아냈고, 체육 시간에 달리기 경주라도 열리면 상대 아이를 이기기 위해 이를 악물고 열심히 내달렸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지만 어린 나는 유독 칭찬에 목을 맸다. 마치 그 칭찬이 나를 있게 하는 온전한 말인 것처럼, 나를 향한 타인의 유일한 호의인 것처럼 굴었다.


 초등학생이 지나고, 중학생이 되어서도 집착은 여전했다. '뭐든 잘하는 착한 모범생'이라는 허무맹랑한 이미지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았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것은 물론 집에서도 밤을 새워 공부를 했고, 시험기간이 되면 볼펜으로 허벅지를 찔러 잠을 참아가며 끈질기게 공부했다. 당연히 몸에 무리가 갔고, 시험이 끝나고 나면 항상 몸살이나 후두염으로 일주일을 꼬박 앓아야 했다.


 그렇게 얻은 성적은 만족스러웠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체육 시간에도, 음악 시간에도, 미술 시간에도 나는 완벽하고 싶었고, 그걸 이뤄내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그렇게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나는 완성되어 갔지만, 속으로 나는 무너져 내렸다. '착하다' '멋지다' '역시 너 답다' 따위의, 몇 마디 알량한 말을 얻고자 잃은 게 너무 많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연합고사가 끝나고, 나는 잠적했다. 당시엔 SNS를 하지 않았기에 훨씬 쉽게 주위 사람들의 삶에서 자취를 감출 수 있었다. 주위에서 내신 점수를 따기 힘들다며 말렸던 고등학교는 가장 멀고 산간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1 지망에 적어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실패한 탕아의 마음가짐 같은 유치한 이유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헛되지 않았다. 주위에 나무와 푸른 하늘, 낮은 지붕의 주택가밖에 없던 고등학교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도 꽉 찬 3년을 보냈다.


 이전까지는 칭찬받기 위한 일들을 했다면, 고등학교에서는 정말 별 일을 다 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도전해본 적이 없었기에 입학하자마자 학교에서 열리는 모든 행사와 강연에 참여했다. 사회학자, 환경학자, 인문학자, 작가, 창업가 등 여러 사람들에게서 삶의 형태를 듣고 새로운 시선을 배웠다. 정말, 끝내줬다. 교과서의 글자가 아닌,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풀어내는 세상은 너무 생생하고 흥미로워 설레는 마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후 2학년 때부터 내가 관심 있는 일들을 긁어 모아 활동을 기획하고, 글을 쓰고, 대회에 참가했다. 온전히 '나'로 가득한 시간 속에서 나는 여태껏 쌓아왔던 인정 욕구를 새로운 도전의 원동력으로 쏟아부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칭찬에 집착하지 않아도 나 자신이 온전할 수 있도록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나의 주축으로 세웠다. 누군가는 공부하기도 모자랄 시간에 쓸데없는 일을 벌인다며 핀잔을 얹곤 했지만(실제로도 성적이 예전만큼 좋진 않았지만), 내 색깔을 찾기 시작한 시점에서 타인의 시선 때문에 나를 다르게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어떤 장점이 있고, 어느 결핍이 있는지 알고 싶었고 다른 이들도 나를 그런 불완전한 사람으로 바라봤으면 했다.


 그렇게 2년간, 나는 정말 빛나는 모습에서 돌이키기도 민망한 초라한 모습까지 이제껏 알지 않으려던 나를 한가득 쌓아갔다.


***



 특강에서 들은 그 말은 칭찬받기 위해 맞지 않는 일로 나를 치장했던 옛날을 돌이키게 했고, 무의식적으로 자기소개서 내내 내가 해온 일들을 뽐내려던 자만한 나의 정곡을 찔렀다. 정말 부끄러웠다. 칭찬에 대한 무차별적인 집착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내가 좋아하고, 또 하고 싶어 하는 분야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은 아직 많이 크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또다시 몸집을 불려 거대하게 나를 뽐낼 뻔했다는 사실은 창피하고 아찔했지만, 한편으론 이를 자각하고 반성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솔직해지지 않으면 한 글자도 쓸 수 없다.


 이는 자기소개서를 완성하고 입시를 끝낸 지금에도 항상 와 닿는 말이다. 조금은 대단하고 가끔은 초라한 나는 가장 형편없고 부족한 순간에도 나 자신이어야 한다. 한껏 부풀린 몸이 꺼져 일그러진 그 모습을 나라고 인정하는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 글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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