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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Apr 22. 2021

37. 천재

사회가 바라는 이상적인 한 마리의 새

 천재. 선천적으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타고난 사람. 사람의 능력을 평가할 때 주로 최상급의 표현으로 사용되는 이 단어의 한 걸음 뒤에는 수재라는 단어가 있다.


 머리가 좋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 이 또한 긍정적인 표현에 속하지만 속을 깊게 들여다보면 종종 그 씁쓸한 속내가 드러난다. 아무리 노력해도 천재는 되지 못한다는 것. 천재에 버금갈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나 그와 동급으로 칭송받지는 못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수재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 사회가 천재라는 존재에게 얼마나 큰 힘과 독점적 우위를 점하게 하는지를 볼 수 있는 일면이다.


 하지만 나는 천재라는 어휘의 가치따라가지 못했고, 그렇기에 이 부분에서 오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좋게 듣지 못했다. 누군가 내가 그린 그림이나 글을 읽고 천재 같다며 칭찬을 하면, 겉으론 고맙다고 받아내면서도 속으론 마음이 상했다.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 아름답고 완성도 있다는 이유가, 내가 그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규정되는 기분이었다. 지금이야 천재 같다는 표현을 긍정적으로 흘려 넘길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를 하나로 빗대 보자면 뭐랄까, 황새가 되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뱁새 같은 사람이었다. 황새의 길고 쭉 뻗은 다리를 선망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연해지도록 스트레칭도 해 보고, 키높이 신발도 신어 보고, 이리저리 뛰어도 봤다. 그래도 되지 않자 끝내는 억지로 다리를 찢어 황새의 것과 비스무리한 다리를 만들어냈다. 물론 상처투성이였다. 둥그런 몸통에 뼈대만 남은 다리가 붙어있는 나는 뱁새로도, 황새로도 불리지 못한 채 이름을 잃어버렸다.


 그래서일까, 나는 사람들이 내게 아무 생각 없이 건네는 '천재'라는 수식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잘하지 못하는 것을 잘한다고 평가받기 위해, 하고 싶은 것에선 인정을 받기 위해 별의별 일을 했는데.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되기 위해 잃어야 했던 것들이 눈에 선한데 천재라니. 잘하는 능력을 타고나서, 라는 복에 겨운 위치를 가져다대다니. 차라리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핀잔을 던져도 좋으니 흉터를 알아봐 줬으면 했다. 능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의 위치까지 닿는 데까지 걸린 시간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뚤어졌다. 스스로를 천재에 뒤쳐진 사람이라고 평하며 주변에 널린, 나보다 훨씬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곤 했다. 저게 천재라고, 타고난 능력은 저런 불공평한 거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눈을 돌린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곳에 천재는 없었다. 눈을 돌려 마주한 수많은 새들의 다리는 온통 흉터 투성이었다. 까마귀, 까치, 참새, 또 다른 뱁새, 심지어는 진짜 황새까지도 온전치 못한 다리를 가지고 휘청이고 있었다. 모두 저마다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하나 둘 잃어버린 채 같은 목표 아래 자신을 채찍찔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길어진 다리를 보며 웃는 새는 한 마리도 없었다.


 왜 우리는 천재라는 하나의 표상을 꿈꾸며 자랐을까. 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며 자신만의 장점과 특기를 찾아가지 못했을까. 어쩌자고 이렇게 오랫동안 남들과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맹목적으로 경쟁해왔을까. 답은 간단하다. 우릴 둘러싼 사회가 우리가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최고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그렇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취급하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서 정신을 차리고 굴레를 벗어나려 하면 낙오자가 되는 곳에서, 이름을 지운 채 한 마리의 이상적인 황새가 되길 바라게 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천재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천재는 있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날 때부터 좋은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 중요한 건 그 부분이다. 우리는 천재가 되기를 꿈꾸지 않더라도, 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피땀 어린 노력 끝에 자라난 수많은 수재들이 최고가 아니라는 이유로 폄하되어선 안된다. 적어도 사회적인 생존에 있어 개개인의 강박적인 자기혐오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 하면 다리가 찢어진다. 하지만 그 뱁새가 왜 황새를 따라 해야 했는지에 대해 사회는 아직 답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꿈꾸고 있는 삶이 온전히 나의 바람에서 비롯된 삶인지를.


 이 글을 맺는 지금의 나조차도 앞으로의 삶이 정말 온전한 나의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사회의 기준에 의존한 채 나를 향한 비방을 일삼던 예전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흉터가 아물기 시작한 다리를 뒤로 하고 날개를 펼친다. 이번엔 꼭 내 삶을 향해 나아가리라고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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