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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May 02. 2021

41. 작은 끝

슬퍼할 무게조차 갖지 못한

 룸메이트가 사라졌다. 다른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돌아온 룸메이트는 하루 만에 짐을 정리하고 퇴소했다. 2월 20일을 시작으로 2달을 넘게 한 방에서 살았던 사람의 자취가 겨우 하루 사이에 모두 정리됐다. 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한 나는 잠시 기뻐하다, 또 잠시는 걱정하다 끝내는 조금 슬퍼했던 것 같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친밀한 사람을 떠나보낸 사연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정 반대다. '우리'라고 부르기도 어색했던 우리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온전히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수업 일정같이 서로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제야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직장 동료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종종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멋모르고 선을 넘나들다 틀어지기라도 하면 앞으로 같이 보낼 시간도 어그러질 것이 뻔했으니까. 차라리 그 관계의 선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편이 현명한 선택이라 믿었다. 여전히 그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작은 싸움 한 번 없이 2달이라는 시간을 조용히 보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혼자가 되고 나니, 조금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쥐고 있던 관계가 떠나는 이유 하나 제대로 묻지 못하고, 잘 가라는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는 정도의 것이었구나 싶었다. 한 순간에 훌쩍 비어버린 방을 보며 허전함을 곱씹다가, 공허함이 가당키나 하냐는 자문과 함께 아주 잠깐 울었다. 소중한 사람이라고까진 말하지 못하겠지만 내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고도 말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타인과 한 공간에서 길게 살아본 것이 처음이었기도 했고, 생활하는 공간에 돌아올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가끔 위안을 느꼈던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룸메이트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건 아니다. 애초에 다른 사람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고, 낯선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 바에야 혼자 사는 편이 훨씬 낫다. 혼자를 두려워하는 성격도 아니다. 그냥 지금은 너무 갑작스럽게 맞은 끝이 당황스러울 뿐이다. 이별이라는 애틋한 단어를 붙이기엔 너무 사소한 끝이 내게는 처음 맞는 종류의 것이라 적응할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 같다.


 곁에 있는 무언가가 언제든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 너무 당연한 삶의 논리지만 역시 사람은 뭐든 겪어봐야 깨닫나 보다.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은 것이 사라짐에도 순간의 공백감이 찾아오는데 내가 애정을 쏟고 마음을 주고받은 것은 오죽할까. 아마 지금보다 몇 배는 슬프고 큰 두려움이 찾아오겠지.


 아. 이곳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나 혼자 이곳에서 일 년이고 이 년이고 머무르고 싶다. 허무맹랑한 바람인 걸 알지만 그냥 수많은 우연과 운이 쌓여 이루어져 주면 안 되는 걸까. 도저히 또 관계를 쌓고 신경을 곤두세울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또 서로에게 양해를 구하고, 또 새롭게 일정을 조정하고, 또 누군가 무언갈 하면 다른 사람은 그에 맞춰 무언갈 한다는 암묵적인 의무감을 가지는 그런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다. 가끔은 마음이 허하고 때로는 일상이 흐트러지더라도 그냥 다 내가 책임지고 선택할 수 있는 일상을 바란다. 따뜻한 신뢰라던가 위안 같은 귀한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지금을 흔들 변화만큼만은 사양하고 싶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기어이 나를 조금 속상하게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 이름 없이 잊힐 가벼운 끝을 맺으면서도 종일 그를 곱씹었다. 그리고 지금은 마음속 나에게 말을 붙인다. 말 몇 마디 나눠보지 못했어도 마음에 자리를 내주더니, 언젠가는 다가갈 심산이었구나. 이번의 끝은 앞으로 마주칠 수많은 관계의 서막이겠지. 그러니까 너무 흔들리지 말자. 내가 울고 웃음과는 관계없이 나는 또 무언가와 만나고 헤어질 테니까.


  언젠가는 휘발될 오늘의 끝을 기록한다. 나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흐르는 시간 속에서 크고 작게 동요하는 순간의 유일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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