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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May 10. 2021

44. 겁쟁이 낭만주의자

용기가 있었더라면

 낭만: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다. 짧은 문장 몇 마디로 마음이 일렁이게 만들고 없던 추억도 그리워질 만큼 다정한 글을 쓰는 작가다. 작가의 글뿐만이 아닌 사람 자체에 매료된 것이 처음이라 지금의 설렘을 다 말할 순 없지만, 분명 나는 오래오래 이 작가를 좋아할 것 같다. 이 사람이 써 내려가는 낭만에 싫증 날 때가 온다면 그건 정말 먼 미래의 일이 될 테니까.


 작가의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으로, 협소하게나마 그 삶의 단면을 훔쳐보며 참 반짝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몇 개의 장면만 보고 그 삶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편협하고 몰상식한 짓인지 안다. 그래서 최대한 뇌에 힘을 풀고 순수한 감각적 감상을 담아낸 표현이 '반짝임'이라는 점을 이해해줬으면 한다. 부작용으로 나도 그 감각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는 상황에 빠지긴 했지만 뭐, 굳이 설명해야 할 의무도 없으니 된 거 아닐까.


 좋아하는 것을 말하다 보니 맥에 맞지 않게 말이 길어졌다. 무튼 갑자기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다느니 하는 서두를 꺼낸 이유는 작가의 글들을 보며 새삼스레 떠오른 오늘의 글감, 낭만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갈증을 어루만질 수 있는 거침없는 낭만을 동경했다. 스스로 낭만을 쫓는다고 말할 있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살아낼 있는 용기가 있다는 것이 부러웠고, 남들은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일상의 낭만을 쥐어내는 모습이 부러웠다.


 타인의 낭만을 동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낭만적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닌 현실에 구속되지 않음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였고, 그건 낭만적인 사람이라 자부하던 내가 얼마나 현실에 끌려다니고 있는 인물인지를 자각한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낭만적인 사람이야."


 내 주변 사람의 대다수는 머리를 갸우뚱하고 몇몇은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말. 나의 낭만이 얼마나 내 삶에서 협소한 자리를 제공받은 채 생을 연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말라죽지나 않았으면 다행이려나, 자칭 낭만주의자로 살던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쉽게 이유를 들 수 있다. 나는 세상을 처음 살아보는데 심지어 겁도 많다. 일단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모르겠는데 여기서 실패하는 것도, 뒤쳐지는 것도, 미움받는 것도 무섭다. 현실에 묶이지 않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것이 낭만이라면 나는 현실에서 고꾸라질 게 무서워 되려 땅을 파고 다리를 묻어놓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짓이야!라고 말해봤자 소용없다. 우스꽝스러운 꼴인 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니까. 언제나 그렇듯 이건 용기의 문제다. 현실의 눈치를 살피는 걸 그만두고 내가 생각한 낭만을 향해 발을 뻗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걸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예상 가능하겠지만 나는 항상 거기서 백기를 들었다. 내게 현실은 항상 이탈하는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곳처럼 느껴졌고, 그런 날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은 마치 내 모든 삶을 좌우하는 권위자들처럼 느껴졌으니까.


 이미 시작했으니 변명을 조금 더 붙여보자면, 나라고 일탈하기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나도 학원을 빠지고 친구들과 추억을 쌓고 싶었고, 자습만 가득한 날에는 조퇴를 하고 바다에 가고 싶었다. 밤늦게 생일인 친구의 집 앞으로 찾아가 깜짝 파티를 해주고 싶었고, 답답한 독서실을 나와 운동장에 걸린 그네를 타고 싶었다. 그래, 그때 내가 너무 늦었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그 계획들을 물리쳤던 건 정말 싫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내가 가장 갈망하던 종류의 일탈이었고, 내 세계 최대의 낭만이었다.


 도대체 몇 번의 기회를 더 놓쳐야 그 서러움이 두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택도 없는 용기를 키우는 방법은 알 길이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러 번 잃어보는 일뿐이겠지. 언젠가 잃는 것이, 미움받는 것이 더 이상 많이 두렵지 않을 때가 온다면 그때는 나도 나의 낭만을 향해 삶을 던져보고 싶다.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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