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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연 Dec 28. 2021

슬기로운 필사 생활

[심지연의 월간 독서] 책 속의 보물을 찾아내는 일

필사, 책을 손으로 직접 베껴 쓰는 일



필사는 쓸데없는 노동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독서모임에 필사 노트를 챙겨 온 사람이 신기했었다. 정갈한 필체로 흔들림 없이 써 내려간 흔적 때문이었다. 물론 학창 시절 때부터 좋은 독서법이라고 배웠지만 툭하면 깜지로 벌을 내리던 시절 좋아하는 책까지 손 아프게 써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더군다나 내 글씨체는 기본적으로 읽기 좋은 모양은 아니었다. 당연히 필사는 꿈꿀 틈도 없이 저절로 관심이 안 갔다.


그런데 이제 필사를 시작한 지 반년이 다 되어간다. 계기는 인스타그램에 독서 게시물을 올리고 또 찾아보다 보니 알고리즘도 그와 관련된 게시물이 보이곤 하는데 어느샌가 '필사'게시물도 눈에 띄게 많이 보였다. 작은 노트에 알맞은 구절이 오목조목 쓰여 있는 사진과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반복적으로 보다 보니 예뻐 보였다. 생각보다 필사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필사의 어느 점이 좋은 건지. 손만 아픈 거 아닌지. 과연 쓰는 데나 읽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가. 좋은 독서법이라 알려진 것 말고, 무언가 현실적으로 와닿을 정도의 좋은 점이 있으니 쓰는 거 아닐까 하는 다른 믿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 1>의 구절처럼 필사에 대한 도전의식이 생겨났다. 우선 (모든 건 장비빨이라며) 독서 문구를 판매하는 온라인 스토어에서 독서 기록용 마스킹 테이프를 구입했다. 배송 온 날 이후 독서 시간 필수 아이템엔 필사 도구도 함께였다. 어떤 사람들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베껴 쓴다던데 나는 그럴 자신은 없으니 마음에 남는 구절을 그때마다 베껴 쓰기로 했다.


온라인 스토어 <라잇요라이프>에서 구매한 '북러버 마스킹 테이프'
한동안 내 독서 광경(?)


필사를 시작하기 앞서 세운 규칙은 두 개.


필사용 노트는 크기가 작을 것.

글씨체에 연연하지 말고 막 쓸 것.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노트를 언제 어디서나 펼쳐 쓱 하고 쓸 수 있어야 부담 없이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글씨체에 집착하다 보면 필사에 금방 싫증을 느낄 것 같았다. 독서 시간이 분주해졌다. 원래도 마음에 드는 구절에 밑줄 긋고 플래그로 표기하는 습관이 있는데 필사까지 하려니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할 관문이 많이 생긴 기분이었다.



마스킹 테이프를 손으로 대충 찢어 노트 상단에 붙이고 제목만 적은 뒤 밑줄 그은 연필로 (사진으로도 알 수 있듯) 나만 알아볼 정도로 구절을 휘갈겨 썼다. 당시 매일 2~3시간 독서에 빠져 있을 때라 작고 얇은 노트는 금방 세 권이나 바닥을 드러냈다. 그 덕에 한동안 노트들을 휘리릭 넘기며 뿌듯해하는 것도 하루 일과 중 필수 코스였다.


내 필사 노트 연대기 (ㅎㅎ)
이 노트 이후로 줄 있는 노트는 쓰지 않는다. 글씨가 더욱 엉망진창.
어떤 노트는 첫 장에 목차 식으로 목록을 만들었다.


세 권째 작은 노트를 썼을 때 내게 남은 건 그저 뿌듯함과 내가 읽은 독서 목록을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좋은 구절을 한번 더 씀으로써 잘 기억된다고 느끼거나 하는 건 없었다. 하지만 문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취미로 자리 잡고 있었다.


네 번째 필사 노트는 다름 아닌 일기장으로 쓰고 있는 줄 없는 몰스킨 노트다. 필사도 어느 정도 습관을 들였고, 손 일기 생활에 다시 접어들면서 필사 노트를 어디다 써먹을 것도 아닌데(?) 굳이 분리해서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한 여름쯤부터 내게 독서 시간이라 하면 밑줄 긋고 플래그를 붙이고 일기도 쓰고 필사도 하는 시간이 되었다.


가장 우울하지만 좋은 책.
이 책을 읽으면 이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랑이 묻어있는 책.


필사 노트를 일기장으로 통합하고부턴 조금 유연하게 쓰게 되었다. 처음 읽는 구절을 실시간으로 쓰는 것이 아닌 그날의 일기를 쓰다 말고 연결되는 구절이 생각나면 찾아 쓰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다시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책을 골라 밑줄 그은 부분만 다시 쓰기도 했다. 일종의 명상이 된 셈이다. <거짓의 조금>과 <쉬운 천국>을 쓰던 날은 같은 날이었는데 다시 읽고 씀으로써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으니 이만한 가성비 치료도 없다.


너무 좋은 책은 대사마저 별 의미 없는 대화도 필사한다.
방은 곧 그 사람의 세계라고 생각하던 내게 너무 좋았던 책.


좋은 책이라는 기억은 모든 문장이 좋았다기보단 한 문장이라도 마음에 쏙 든다면 좋은 책이 되는 것 같다. 문장 하나로 책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알 수 있듯 개인이 느끼는 감정에 따라 책의 가능성은 무한으로 뻗는다.


필사는 하나의 수련 행위. 덕질. 


나는 필사가 가지는 쓰기 능률의 향상이나 사명감, 기능, 철학 같은 건 모르지만 

앞으로도 책 속의 보물을 찾아내듯 기록할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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