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지연 Oct 03. 2023

퇴사 후에 오는 것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읽고

9월이 가을의 시작을 알린다는 말도 옛말이 되었다. 여전히 반팔을 입고 집을 나서는 무더운 날이 계속되었다. 한차례 태풍이 왔다 가고, 지독하게 비가 내렸다. 계속해 더운 날이 이어지다 하늘이 청명하던 어느 정오엔 오 년간 동고동락한 동료들과 가을을 실감했다. 여름내 모아둔 용기를 꺼내 상사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삶의 한 폭을 차지한 지난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용기만 꺼내고 싶었는데 눈물도 딸려 나왔다. 이날을 위해 오래 정리한 말들을 쏟아내고 건물 밖을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통과했다. 지독한 더위도 한때라는 사실이 당연해서 기뻤다. 가벼워서 기뻤다.


주말엔 호암 미술관에 갔다. <한 점 하늘 김환기>라는, 화가 김환기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환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아내 김향안과 거리에서 찍힌 다정한 사진 한 장이 인스타그램에 자주 떠돌아다닌다는 것, 그가 유명한 화가였다는 것, 김향안이 쓴 <월하의 마음>이라는 책이 절판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는 항아리를 사랑했고, 붓 칠을 사랑했다. 평생 붓 칠하며 살았음에도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 무색할 정도로 무한히 꿈을 키우고, 모자란 세월을 아쉬워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371p. 죽을 날도 가까워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나는 그림이 주는 황홀함은 잘 모르지만, 그림들 사이로 그가 기록한 짧은 글들을 읽을 때마다 그 소년 같은 명랑함에 매료되었다. 돌아오는 길엔 그림 대신 그의 에세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주문했다.  


맑은 날은 이어졌다. 손익을 따져가며 무겁게 고민했던 퇴사 결정을 무를 수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다. 차근차근 마무리를 하는 것. 내겐 아직 이직할 직장도, 또렷한 목표도 없다. 이렇다 할만한 얻은 것도 없었지만 다가올 미래의 변수를 감내할 자신은 생겼다.  


또렷한 결말 없는 모호한 분위기의 작품도 다시 좋아졌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운 즉흥 여행도 떠나고 싶어졌다. 여름내 방구석에서 망설이기만 했던 모든 것들은 이젠 어떻게 되던 상관 없어진 것만 같다. 당장 내일 저녁 경주에 도착하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퇴근길엔 배낭을 메고 집이 아닌 서울역으로 향했다. 무겁고 두꺼운 김환기의 책을 기차 안에서 펼쳤다.



졸리면 자고 일어나면 일을 하고 따분해지면 목욕을 하고
산보를 하고 음악은 아침에 듣는다.
아침에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그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항상 마음이 청명하고 명랑하게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



전쟁 직후, 파리와 뉴욕에서 예측할 수 없는 앞날에 모든 걸 걸고 붓 칠하러 다니던 그의 삶을 두꺼운 책을 읽으면서까지 궁금했던 까닭은, 아득함 속에서도 잃지 않는 낭만이었다. 실제로 그는 화가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낙천가(95p)라고 표현했으며, 애인이 있는 곳이 고향(188p) 일 거라는 사랑의 편지를 쓰고, 말년이 다 되어서도 항상 마음이 청명하고 명랑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250p)  


경주의 밤은 제법 쌀쌀했고, 낮은 한여름처럼 더웠다. 가을을 기대하며 입고 온 긴 재킷 하나가 가져온 옷의 전부였고 비좁은 거리엔 여행객이 바글거렸다. 하는 수없이 낮엔 침대에 누워 여행지인지, 집인지 모르게 시간을 때워버렸다. 일몰 시간에 맞춰 두어 시간 경주를 걷다 아홉 시도 안 돼서 숙소로 돌아와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집에서도 볼 수 있는 영화를 새벽 다섯 시까지 실컷 보다 잠에 들었다. 집요하도록 변수와 손익에 목메던 방구석에서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책을 모두 읽었다. 마음속 수용의 공간을 넉넉하게 만들어준 것들에 관해 생각했다. 두꺼운 그의 글이 내게 남긴 것도 선명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피난길에서, 전쟁 후 아끼던 항아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보면서, 가난했던 파리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말년에 뉴욕에서 건강이 악화되면서도,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생각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 잃지 않았던 그의 명랑함이 내게 우아함으로 남았다.








이전 19화 용기의 체력을 모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