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컥하는 마음이 자꾸만 속을 긁을 때마다 실을 엮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위빙 공예를 시작했다. 심심한 손가락이 마음을 재촉하며 수시로 꼼지락거렸다. 특별한 정보 없이 직조틀과 실부터 샀다. 네모난 직조틀에 원하는 실을 가로, 세로, 위아래로 교차하자 금세 쓸만한 실 받침대가 만들어졌다. 처음 며칠은 하나를 만드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이걸 만들어서 팔면 시간노동비로 만원 이상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작업이 손에 익었다. 그다음부턴 하나 만드는 데 삼십 분이 걸렸다. 삼십 분, 고작 삼십 분이라니.
실과 실을 엮는 일은 꽤 재미있었다. 실이라면 반짇고리 말곤 몰랐던 내게, 수십 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실 종류는 마치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지만, 동시에 설레는 뷔페 같았다. 굵기와 모양, 색, 소재의 홍수 속에서 실과 실을 조합해 빠른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는 점도 흥미로웠다. 나는 성취감에 중독되어 한동안 반복적인 일을 하는 공장에 출근한 것처럼 퇴근 후 나만의 공방으로 출근했다. 책상 한 편, 겨우 컵 하나 받칠 수 있는 크기의 작은 받침대가 겹겹이 쌓여갔다.
그것은 가만 보니 글쓰기와 꽤 닮기도 했다. 색(소재)과 색(주제)을 조합해 마음대로 엮어도 되는 점. 공들이고 나면 끝내 마음이 단정해지기도 하는 점. 만들수록 내가 좋아하는 색(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점까지. 올여름, 글쓰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 덜어 실 받침대를 만드는 데에 써보기로 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올 때, 몇 개의 주변 환경이 변했다. 계절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마음이 어수선했다. 정 붙인 사람들과 의도치 않게 헤어졌고, 동기부여 사라진 직장을 박차고 나갈 용기는 없었다. 일부에 불과했다. 그것으로 인해 결정해야 하는 중대한 것들이 과제로 남았다. 삶은 재즈와 비슷해, 즉흥적일 때 가장 좋다는 작곡가 조지 거슈윈의 말을 밑줄 치던 모순적인 나도 남았다. 즉흥이며, 결정 같은 건 모르겠고, 실이나 엮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절대적인 믿음 같은 건 없다고 여겨왔지만 금세 무종교인 것이 서러워 사주를 봤다. 올해와 내년에 구설수가 있고 사람으로 하여금 상처받기 쉬운 운세이니 유의하십시오. 때론 과거의 빅데이터가 인생의 길잡이가 되기도 하나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갈등이 벌어지면 치사하게 사주를 떠올리던 옹졸한 마음은 매일 나를 공방으로 데려갔다. 울컥하는 마음이 자꾸만 속을 긁을 때마다 실을 엮었다.
그 일을 할 때면 마음이 안심되었다. 내가 고르고 엮는 이 실은 내 손을 타도 어떤 변수도 없이 또렷한 결과물로 남는다. 그 무렵 내 마음은 싫은 것 투성이. 모호한 믿음 금지. 연민 금지. 이타적인 행위 금지. 너무 슬퍼 가슴이 애린 작품 금지. ‘리틀 포레스트’처럼 착한 작품도 금지. 그러니까 희망적인 생각을 요구하거나 또렷한 결말 없는 것들은 뭐든 내게 무의미했다.
실을 엮지 않을 때 내 마음은 여름의 늘어진 더위만큼 무기력하거나, 이어달리기 마지막 주자처럼 쫓기듯 헐떡였다. 햇빛을 거둬줄 양산은 없고,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낮이고 밤이고 그늘 없는 정류장에서 원하는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못난 사춘기처럼, 자주 울컥했다.
실을 엮는 일에만 집중했다. 어느새 받침대는 산처럼 쌓였다. 그러는 동안 책상 위엔 엉킨 실타래는 너저분하게 굴러다녔다. 서로 다른 종류의 실이 뒤죽박죽 엉켜있는 실타래를 볼 때마다 결정을 미룬 것들을 생각했다. 실타래 푸는 법을 몰라 모두 가위로 잘랐다.
집안을 돌아보니 온갖 미룬 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갈 곳 잃어 쌓여 있는 여러 권의 책, 의자 위 쌓인 옷가지, 한동안 방치한 분리수거, 매일의 기록에 실패한 일기장… 모두 내일의 나에게 미뤄온 일들. 하지만 끝내 내일의 내가 원했던 대로 해내오던 일들. 이러한 조그만 해결과 선택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유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와 행복하다고 여겼던 어느 아침, 온종일 고단해 울고 싶었던 여러 번의 밤, 충분히 이완되었다고 믿고 싶어지던 실을 엮던 순간들이 모여 여름내 미뤄둔 마음의 소리를 들여다볼 차례라고 알린다.
나는 무사히 입추를 통과했을까?
가을에 부는 선선한 바람이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기를 바라는 한 시절을 감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