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일희일비의 삶을 살 테지만, 천천히, 느긋한 마음을 연습해 보기
까뮈는 로마 시대의 도시 유적인 제밀라에서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그 풍경이 내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위대한 진실은 바로 정신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마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햇살에 따듯해진 돌, 혹은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서 흠씬 키가 크듯 위로 솟구치듯 시프레나무, 바로 그것이 ‘이치에 맞는다’라는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를 금 그어주는 경계선이라는 사실이다. 유일한 세계란 다름 아닌 인간이 없는 자연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나를 무화한다. 그것이 나를 저 극한에까지 떠밀어간다. 세계는 분노하지 않은 채 나를 부정한다. <결혼, 여름 67p>
이 글을 발견했을 때, 나는 오사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창밖으론 내리쬐는 햇볕으로 먼 거리에서도 드러나는 윤슬이 자글자글 빛났다.
자연에 압도되는 것. 압도될 만큼 경이로운 자연을 느껴보는 것. 그런 곳을 제 발로 찾아 가 본 지가 언제였더라. 마음이 거의 전부인 탓에 일희일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 내게, 과연 마음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정도의 자연 속에서 경이로움을 느껴본 때가 있던가?
비행기는 어느덧 간사이 공항에 착륙했다. 밖으로 나가자 일본의 습도와 열기가 한 번에 밀려왔다. 무더운 날씨를 견딜 앞으로의 4일이 걱정되었다. 지하철을 타고 난바 역으로, 다시 걸어서 호텔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수영 없는 이 여름휴가가 내게 가져다줄 기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거리엔 그늘 하나 없었고, 태양은 꺼질 줄 모르게 뜨거웠다.
도시를 여행한다는 건, 무대를 옮겨 일상을 사는 것이다. 각 도시 어디에나 있는 브랜드숍,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 커피숍,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는 트렌디 하거나 전통적인 특징의 식당을 걸음마다 마주치는 것. 자연 속에서 떠오르는 아득한 상상을 하는 것 대신 오로지 현재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보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도시 여행을 즐기는 것의 전부다.
도시 여행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사카가 크게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4일뿐이었고 푸르른 자연 앞에선 황망한 마음이 모두 쏟아져 나와버릴 것만 같았다. 때로는 깊숙한 마음의 소리를 꺼내지 않은 채 이곳과 비슷한 다른 곳을 여행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할 수 있는 건 시원한 식당에서 무언갈 먹고, 배를 채우면 걷는 것이었다. 여행 내내 글리코상과 스타벅스 사이 흐르는 도톤보리 강가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자정이 다 된 시간 호텔로 돌아와 매일 그날의 걸음 수를 확인해 보니 2만 보, 2만 5 천보, 1만 9 천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한낮엔 뜨거운 태양을 정면으로 맞으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목적지 없이 번화가를 배회했다. 무방비로 신은 낮은 신발로 겨우 치료한 족저근막염이 재발병 할 것처럼 욱신거렸다. 더위에 지쳤지만 짜증은 안 났다. 휴대용 선풍기와 푹신한 러닝화가 있었다면 더 오래 걷고 싶었을 거였다. 오기였거나, 순간의 유일함 때문이었거나.
여름이라면 더위가 끌고 오는 각종 찐덕임으로 기겁하곤 했다. 물속에 몸을 담가 끈적임을 없애고, 얼른 에어컨 아래로 숨어버리기. 여름을 그런 식으로 건너왔다. 다음 계절이 얼른 다가와 주기를 바라며, 입추를 세어봤었다. 그러나 이곳은 내가 고른 여행지, 한여름의 일본. 날씨나 신발 탓을 할 수 없는 곳. 하는 수없이 걸으며 여행해야 하는 곳. 그래. 내가 언제 또 한여름에 굳이 뙤약볕 아래 이렇게 오래 걸어보겠어? 하고 내뱉어버리니 여름이 울컥할 정도로 좋아졌다면 믿어지려나.
계절의 흐름보다 내 마음의 계산을 먼저 한 여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견딜 수 있는 것과 견딜 수 없는 것을 가늠해 보느라 머릿속이 늘 풀가동이었다.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 내 인생에, 작은 것 하나를 선택하는 일에도 신경이 곤두세워졌다. 그렇게 질주하는 마음을 자연에 풀어놓기 싫었다.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자연 앞에 덧없음을 벌써 실감하기 싫었다.
그러는 동안 삼일은 훌쩍 지나가고,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교토에서 2만 보를 찍고 너덜 해진 몰골로 다시 오사카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저녁 9시. 스키야키를먹자던 친구의 말에 급히 검색한 식당은 마감 1시간 전이었다. 도톤보리 메인 거리에서 조금 벗어난, 어느 뒷골목 지하에 숨겨진 작은 식당이었다. 보통 식당은 마지막 주문 시간을 정해 두기에, 조급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식당을 채운 설거지 소리, 뒤집힌 반질반질한 그릇들이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마감을 말해주던 분위기. 마감하셨나, 싶어 주춤하던 그때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다이죠부’(괜찮다)라고 하며, 친절하게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맥주 안 마시는 친구 자리엔 얼음물이 세팅되었고(보통 아무것도 주지 않았는데) 곧이어 냄비와 요리가 준비되었다. 팔팔 끓는 육수와 맛있게 불어가던 두부, 버섯, 고기. 익힌 고기를 날계란에 풀어 한입 가득 입에 퍼지던 부드러움. 날계란 못 먹는 내게도 그 요리는 여행 내내 먹은 요리 중 단연코 최고였다. 우리는 연신 오이시 데스(맛있습니다)를 남발했다. 못 왔다면 아쉬울 정도였다.
먹는 동안 식당의 마감 시간이 다가오고, 우리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작은 키인 우리에게 조금 높은 의자를 내려오며, 좀 우당탕탕. 그러자 주방에서 사장님이 다급하게 나와 윳쿠리, 다이죠부 윳쿠리를 외치셨다. 무슨 뜻인가 찾아보니 천천히, 마음 편히, 느긋하게. 다이죠부 윳쿠리는 천천히 해도 괜찮습니다. 마감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조급했던 건 나뿐이었다. 매섭게 불던 마음의 풍파가 행동에도 드러났었나 보다.
삼일 동안 난, 하이힐 신고 뛰어다닌 것처럼 발바닥 아파 주저앉고 싶었을 때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사람 많고 불 밝은 도시에 갔다. 뜨거운 여름, 뜨거운 오사카에서 걷기만 한 건 오기였다. 오기 안에서, 뜨거운 태양 아래서 까뮈의 말이 어떤 뜻인지 어렴풋이 느껴보았다. 마음씨 너그럽던 아주머니로부터 내가 나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다시 돌아온 이곳에서 여전히 일희일비의 삶을 살 테지만, 오늘부터 천천히, 느긋한 마음을 연습해 보기.
윳쿠리. 다이죠부 윳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