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 동화 <집에 있는 부엉이>를 읽고
좀처럼 살 일 없는 동화책을 샀다. 아놀드 로벨이라는 미국인 작가가 쓴 <집에 있는 부엉이>라는 책이다. 어렸을 적 큼지막한 글자, 듬성듬성 실린 삽화, 얇은 굵기, 쉽지만 시시하진 않던 이 책을 꽤 좋아했다. 친구에게 빌려주었다가 코딱지를 묻힌 채 돌려주어 읽을 수 없게 되었지만… 책은 추억 한편에 보관되다가, 어느샌가 책장에서도 사라져 제목마저 잊게 되었다.
그러던 몇 달 전, 인스타그램 돋보기에 익숙한 책표지가 눈에 띄어 들여다보니 오래전 잃어버린 그 책이었다. 이걸 읽은 어린이는 나만이 아닐 테지만, 요즘의 알고리즘은 잊고 지냈던 추억까지 불러주나 싶게 반가워 책을 다시 주문해 봤다. 부엉이가 집에 혼자 머무르며 벌어진 다섯 가지 이야기 중 서른 살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감성을 건드려주는 편은 ‘눈물 차’ 이야기다.
눈물 차를 마셔야겠다고 다짐하며 찬장에서 주전자를 꺼낸 부엉이는 이내 슬픈 일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는 노랫말을 잊어 부를 수 없는 노래들, 난로 뒤에 떨어져 다시는 못 본 숟가락들, 가까이에 태엽을 감아줄 사람이 없어 멈춘 시계들 같은, 그러니까 지금은 쓸모가 없어진 것들을 생각하며 눈물로 주전자를 채운다. 눈물로 끓인 차는 짭조름한 맛이 나지만 왜인지 부엉이는 행복한 기분을 느낀다는 서술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밀도를 성실하게 쌓고, 한 번에 털어버리고, 개운해지기. 부엉이가 가진 행복은 무언가에 몰두하는 에너지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다가, 얼마 전 다녀온 여행을 떠올려본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갔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났던 여행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개운함을 선사해 주었다. 돌아갈 곳이 없어도 조급하지 않을 수 있음이 나를 온전히 나 자신만으로도 풍족하게 만들어 줄 줄이야. 억지로 갖지 않아도 저절로 드는 편안한 마음, 그리하여 나 자신을 향한 진실되고 소박한 기쁨을 생생하게 감각했다.
그러나 해방감의 농도와는 별개로, 직장에서의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겨온 건 아니었는데. 다만 나는 과열되어 있었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 땅굴 깊숙이 숨어있는 오류의 원인을 발견했을 때의 쾌감, 도무지 진전 없는 일에도 늘 켜두었던 시동에 내가 가진 에너지의 대부분을 일희일비하며 소진했었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니 좋고 나쁨을 떠나 내가 그것에 대단히 몰입했음을 인지한다.
옛 동화를 다시 읽고 부엉이가 감정을 소모하며 끓인 눈물 차를 마시며 행복했듯, 오늘 밤 나는 무슨 차를 끓일 수 있을지 여러 개의 감정을 골라보다가, 무언가를 집요하고 구체적으로 생각해 낼 수 없음에 다다른다.
요즘의 나는 차를 끓일 정도의 과열된 '무엇'이 부재한 지 오래. 지금의 나를 나타내는 소속 없는 무의 상태는 고요하기만 할 뿐 크게 기쁠 일도, 슬플 일도 없다. 에너지의 총량을 다 써본 게 언제였던가.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은 무감각하다. 그러고 보니 올해 읽은 책의 대부분은 나의 이완을 위한 담백한 맛이었다. 롤러코스터 같던 감정의 리듬은 늘 잔잔함을 지향했으면서. 그런 과열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밍밍한 요즘의 일상은 영 어색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