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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키 Sep 09. 2024

방탈출, 어디까지 해봤니?

방탈출과 조울증의 상관관계

나에게는 은밀하게 자랑하고 싶은(?) 취미가 하나 있다. 바로 방탈출이다. 해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다는 그 방탈출..! 나는 탈출만 60번 넘게 성공해 본 꽤나 전도유망한 탈출러다. 한참 빠져있을 때는 하루 3 연방까지 클리어했던 전적이 있다. 지금은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탈출을 감행하면서 ‘100방’의 꿈을 꾸고 있다.


가장 최근에 한 방탈출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은밀하지만 또 별로 자랑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비밀이 하나 있다. 내가 8년째 조울증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나는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나오는 그런 중증 조울증 환자는 아니다. 흔히 말하는 경조증이다. 요즘은 조울증이나 우울증에 대해서 사람들의 인식이 예전보다는 부드러워진 부분이 있다. 70% 정도는 오은영 박사님의 지분이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이 사실에 대해서 예전처럼 심란한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처음에 진단을 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 두려움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니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니었나요?
(아니었다고 한다.)

조울증을 진단받고 나서 놀란 마음도 마음이었지만, 당장에 매일같이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싫어하는 약을 언제까지도 모를 기간 동안 먹어야 한다니..

내가 하루에 먹는 약들이다. (언뜻보면 달 주기 같다.)


그렇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였던가. 처음에는 괴로워하며 매일 눈물맛으로 먹었던 약들을 이제는 시원하게 한입에 털어먹게 됐다. 그나마 약이 들어서 어디냐 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약을 먹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하나의 방탈출을 성공하면 다른 방탈출을 하고 싶은데, 한 번의 조울을 이겨내면 또 다른 조울이 기다라고 있는 것 같다. 


방탈출과 조울증의 비례값을 구해보시오.
(5점)

방탈출과 조울증, 하등 상관이 없어 보이는 두 축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까? 생각보다 재미있는 연결점이 3가지 정도 떠올랐다.


첫 번째.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싸다.

방탈출은 취미치고는 비싼 편이다. 요즘 프리미엄 방탈출은 웬만하면 3만 원 이상이다. 조울증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진료비나 약값이 비싸다기보다도 입이 비싸야 한다는 말이다. 조울증의 특징 중에서는 자기가 조울증이라는 병증을 진단받았다는 사실을 떠벌리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한다. 거짓말 같지만 진짜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까지야 그렇다고 쳐도, 별로 안 친한 학교 동기나 회사 사람들한테까지 얘기를 한다. 그래서 내 사회생활에 썩 좋지 못한 꼬리표가 생길 위험이 있다. 그러니 스스로 입단속을 비싸게 해야 한다.

 

두 번째. 탈출하고 싶을수록 문제들이 더 어렵고 복잡해진다.

방탈출이야 말할 것도 없고, 조울증은 정말 더 그렇다. 내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약을 열심히 먹어도, 병증으로 인한 많은 문제들을 날마다 맞이하게 된다. 조울증은 전두엽의 호르몬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는 약을 먹다가 지쳐서 혼자 조용히 약을 끊어본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조와 울의 기복은 심해졌다. 전문의사의 진단 없이 약을 끊을 경우 병증이 심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혼자만으로 해결해 나가기가 어렵다.

방탈출에서는 흔히 1인팟으로 혼자서 하나의 테마를 탈출하는 고수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보통은 2-4명의 팟으로 팀워크를 이뤄내야 좀 더 재밌고 순조롭게 방탈출을 성공할 수가 있다. 조울증도 마찬가지다. 온 동네에 소문낼 필요는 없지만, 정말 나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미리 도움을 요청해 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잘랐던 신용카드를 재발급받거나 갑자기 유흥을 즐기고 싶은 증상이 생길 때, 이들의 감시는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도움을 받아야, 문제를 키우지 않을 수 있다.


조와 울, 두 개의 거대한 산들 사이에서 꿋꿋히 살아간다. (c)2024. 아라키 All rights reserved.

사실 방탈출도 매번 다른 난이도와 다른 테마의 방을 도전하기 때문에 언제나 기분 좋게 탈출에 성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도 70번 넘는 방에 도전해서약 60방 정도 탈출에 성공했다. 높다면 높은 성공률이지만, 막상 방탈출에 실패하는 날에는 마치 내 하루를 날려먹은 듯한 찝찝함과 짜증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오곤 한다.


조울증과 함께하는 삶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약도 잘 먹고 크게 날뛰는 기분도 없이 별일 없는 하루를 잘 탈출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반복적인 문제들로 인해 안정적으로 하루를 탈출하는 일에 실패한다고 느낄 때도 많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기 전 오늘 풀기 어려웠던 문제에 대하여 오답노트에 기록만 해놓으면 그만이다. 오답정리를 잘해놓을수록 실수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방탈출 후 찍는 인증샷. 17분이나 남기고 성공했다.

방탈출에 성공하면 탈출을 인증해 주는 보드판에 싸인을 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언젠간 나도, 나 스스로가 이만하면 됐다고 느낄 수 있는 날에 보드판에 싸인 한번 멋지게 하고 사진도 찍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 탈출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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