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연민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꼬인 목걸이 줄을 풀어본 적이 있는가?
한껏 지 성격대로 꼬여있는 목걸이를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게 된다. 심지어 그게 중요한 외출 직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떻게는 꼬인 줄을 풀어보려고 애쓰다가, 결국에는 승질에 못 이겨 잡아 뜯어서 줄을 끊어본 적도 여러 번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 20대가 그랬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면서부터 시작된 나의 방황기(aka. 약 없이 살아가던 시절들)는 아주 다양한 형태로 변곡 되어가며 꼬이고 또 꼬이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목걸이 줄과는 다르게 인생은 맘에 안 든다고 잡아 뜯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의 고민과 방황은 깊어만 갔다. 분명히 뭔가 잘못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그리고 어떻게 잘못됐는지 모르겠는 답답함은 30대가 되기 전까지도 나를 매 순간 체하게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들이 있다. 나는 생각보다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리고 나는 꽤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가 나의 첫인상을 물어볼 때면 항상 들어가는 말인 "밝고 당당함"과는 정반대 지점에 있는 나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나는 외향형 100%에 어디서나 붙임성이 좋았기 때문에 내가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외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과 긍정적인 사고력을 가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꽤나 험한 인생의 파도에 휩싸이고 날카로운 자갈들에 발을 베어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오늘의 생활 정보 : E 100%여도 부정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어떤 시행착오들이 있었는지는 차차 풀어보도록 하겠다..) 가까스로 자기 객관화를 통해 아프지만 뚜렷하게 나의 진짜 모습을 직면하게 된 후부터, 더 큰 문제가 생겨버렸다. 뚜렷한 자기 객관화의 과정 이후에는 차가운 자기 연민에 둘러싸인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다 보니 그 힘든 시간들을 보내며 망가진(?) 나 스스로가 굉장히 불쌍한 것 같은 연민의 마음이 솟구쳤다.
그때의 나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힘들었던 시기에 나를 다독이고자 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과한' 자기 연민으로 번졌고, 나는 점점 스스로를 제한해 가며 발전을 위한 다짐과는 멀어져 갔다. "그 일을 하다 보면 나의 낮은 자존감이 박살 날 수도 있어"..."마음의 힘이 단단한 사람들이 부러워. 나의 부정적인 마음은 언제쯤 나아질까".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계속 제자리였고,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어른아이가 되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파도를 거스를 때가 온 것이다.
다행히 나에게는 파도를 거스를 수 있는 두 개의 서핑 보드가 있었다. 바로 가족과 그림이었다. 물이 코로 입으로 들어가서 숨을 쉬기 어려웠던 나의 SOS에, 가족들은 마음과 시간을 담아서 나를 바다에서 건져주었다.
또한 그림을 다시 그리면서 오랜 시간 묵혀왔던 창작에 대한 열정을 아주 조금씩 끄집어내며 앞으로 나아갈 마음의 힘을 얻기 시작했다. 드디어, 멈춰 있던 나의 나의 지평은 넓어져갔다.
이곳에 기록될 이야기들은 아마도 내가 지독한 자기 연민의 파도에 빠져 물을 있는 대로 퍼먹던 시절에 대한 회고일 것이다. 나아가 그 파도를 나름의 방법으로 다루는 법을 터득해 낸 뒤, 지금까지 삐뚤빼뚤 패들링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일 수도 있다. 앞으로는 지금까지 다소 어슴푸레 묘사한 나의 이야기들을 좀 더 뚜렷하게 전하고자 한다.
다채롭지만 다소 우울하고 불안했던 나의 시간들. 이제는 그 시간들 모두 감히 소중했다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