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반년이 넘었다. 후련하면서도 막막한 기분에 적응하는 데 꼬박 삼 개월이 걸렸다.
이 월부터는 병원을 옮겼고, 유월 중순이 되자 병원 일정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유월 말부터 이것저것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었던 지난 육 개월을 만회하겠다는 듯 글을 쓰고 합평하는 ‘글방’을 다니기 시작하고, 인터넷으로 ‘플롯강화입문’ 수업을 신청하고, 한예종 입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상이 서서히 궤도를 찾는다고 느꼈다.
그동안 모교에는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경기도권의 대안고등학교로, 선생님과 친구들과 보다 깊은 교류를 나눴던 아이들은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삼삼오오 모여 학교를 방문했다. 선생님을 만나고, 급식을 먹은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나에게도 친구들이 몇 차례 연락해 ‘같이 학교에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며 번번이 거절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즐거웠지만 고통스러웠다. 중학교 3학년 때 다카야수동맥염(Takayasu’s arteritis)을 진단받고, 그 전후로 나빠진 건강을 실감하며 대안학교 지원을 결정했다. 아마 몸이 건강했다면 대안학교에 가겠다고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학교 동안 나는 성적이 좋았고, 공부를 좋아했으며, 성실하고 예쁨 받는 모범생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병을 앓게 됨으로써 성적과 선생님들의 기대는 단번에 곤두박질쳤다. 아픈 나에게는 아무도 걱정이 아닌 감정을 보내오지 않았다. 아파도 아프지 않아도 상관없이 나를 바라봐줄 사람을 찾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대안학교 원서를 썼다.
중학교 때 병을 처음 앓게 되면서 알게 되었지만, 교육과정에서 아픈 아이를 따로 챙겨주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병원에 가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등교하지 못한 날 놓친 수업 내용이나 평가는 아무도 먼저 나서서 보충해주지 않는다. 모두 내 발로 찾아가 “제가 뭘 놓쳤나요? 어떻게 따라잡거나 채울 수 있나요?” 하고 물어야 했다. 친구들과의 사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일주일씩 학교를 빠지면, 특히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는 주간이 아닐 때, 친구들은 체감이 가능할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서먹하게 굴던 아이들이 같이 급식을 먹고 있는가 하면, A와 B가 사귄다는 소식을 나 빼고 모든 애들이 알고 있었다. 그럼 나는 그 공백을 따라잡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그러다 가끔씩 수업 중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나가서 다른 층 화장실에 앉아 울고 오곤 했다.
혼자 밥 먹던 급식실, 다들 수업하는 동안 누워 있던 보건실, 앉아서 다른 애들이 축구하는 걸 지켜보던 운동장, 어떻게든 친구들 대화에 껴보려고 온갖 애들에게 말을 걸고 다녔던 휴게실, 나 없이 자리가 바뀌었던 교실까지 모든 곳에 나의 삼 년이 배어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아직 그 공간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든 곳이 날 아프게 찔러올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했던 친구들과 의지했던 선생님들을 만나면 그때의 이야기 말곤 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상상하면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무서웠다.
칠월이 되어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던 재윤이가 올라왔다고 전해왔다. 재윤이를 만나고 싶었는데 재윤이가 학교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원래 학교에 가기로 한 날 아니면 시간이 없다고. 어쩔 수 없었다.
오랜만에 간 학교는 변한 게 없었다. 신학습관으로 가는 다리에 여름이면 활짝 피던 능소화까지 그대로였다. 능소화가 한두 송이씩 져서 떨어진 모양마저도 같아 보였다. 변한 게 없는 건 내 모습도 마찬가지였는지 몇 번밖에 수업을 듣지 않은 선생님들이 나에게 수업시간인데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 서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선생님, 저 졸업생이에요, 하고 말했다. 나조차 실감하지 못하는 말.
친구들이 다른 선생님을 만나는 동안 시간을 내어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교장선생님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생의 이름과 사연을 외우는 선생님이었다. 고민이 있거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자주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신청하곤 했다. 선생님은 일 학년 때 나에게 “네가 졸업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라고 말했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학교에 나갔던 날들이 며칠이었는지. 그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그 선생님을 의지했는지. 선생님은 대화할 때 항상 “너와 이야기하니까 좋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나도 선생님께 특별한 제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재윤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교장선생님이 그만두시는 게 사실이야?’, ‘뭐? 누가 그래?’, ‘선생님 블로그에 그렇게 올라와 있던데... 아니지?’,‘잠시만’
선생님 블로그에 들어가서 가장 최신글을 눌렀다. <후회>라는 제목의 글. 학생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며, 학교를 그만두는 것을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이전 글도, 그전 글도 모두 읽어보았다. 선생님은 2월 14일 내가 마지막으로 블로그 글을 읽은 후에도 몇 편의 글을 쓰셨는데, 모두 학교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는 듯한 어조였다. 창을 닫고 재윤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선생님 진짜 그만두시는 거 맞는 듯’
다른 친구들에게도 물어봤다. 이미 내가 뵙기 전에 선생님을 만나 그만두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친구가 있었다. 학교에 재학 중인 동생을 통해 들었다는 친구도 있었다. 또 나만 학교 소식에 뒤처져서, 졸업한 뒤에도, 심지어 내가 의지하던 선생님조차도…. 무엇보다 이제 더 이상 학교에 가도 선생님이 없다는 것이 나를 낙담시켰다.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었다. 너무 오랜만에 소리 내어 운 탓에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내가 왜 우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마주하기 원하지 않았던 것은 삼 년간의 학교가 아니라 나였다. 지난 삼 년의 나를 마음속 방 하나에 몰아넣고 터져버릴 듯한 방 문을 닫아걸었다. 학교에 갈 때마다 감정들이 물밀 듯 밀려와 문을 벌컥 열어버릴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학교에 갔을 때 감정들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와 선생님이 그만두신다고 하자 당혹스럽게도 감정들이 한 번에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그중 주요한 것은 이 두 가지였다: 1. 왜 선생님은 나에게는 미리 말씀을 안 해 주셨나. 2. 왜 나는 아직도 학교에 있는 것처럼 슬퍼하는가. 핵심은 2번이었다. 나는 학교를 아직 떠나지 못했다. 학교를 좋아하지 말 걸. 선생님한테 의지하지 말 걸. 아등바등,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애쓰지 말 걸. 적당히 다닐걸. 졸업하자마자 대학에 입학이라도 했으면 학교를 매듭지은 것을 실감했을까? 학교에 너무 많은 것이 매여있던 탓에 졸업 후 나를 학교로부터 풀어주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고민하고, 마주해서 학교를 벗어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만 생각했다. 언젠가 나에게도 학교보다 소중한 것이 다시 생기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