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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용희 Jun 06. 2018

본질의 상위 본질에 대한 고찰

챕터1

본질은 형태가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고,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존재 한다는 것이다. 단, 현실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실에, 그리고 눈에 보이거나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것이 감각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다. 인식되어야지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왜 본질에 다가가려 하는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만들고 형성하려 하는 것은 본질이라는 것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은 우리의 오감으로 감지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수많은 시뮬라크르는 본질을 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수많은 시뮬라크르들은 본질을 뛰어넘은 것 같은 것을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본질의 왜곡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인가? 본질은 왜 왜곡 되어지는가? 본질을 상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하다면 본질의 존재는 우리가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리면 우리가 의식하는 본질을 진짜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의식하는 본질이 진짜라면 우리는 왜 왜곡된 세상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인가? 적어도 문명만큼은 왜곡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문명은 분명 필요 이상의 것을 만들어 냈고, 더욱이 필요 이상의 것에 명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현실세계의 시뮬라크르는 분명한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다. 사실 본질의 존재는 본질 이외의 것의 가치를 절하 시킨다. 모든 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모방한 모조품이 되기에 본질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다. 본질이라는 것이 흔히들 무엇에 본질, 그러한 것에 본질 등으로 생각 할수도 있지만 유일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나무. 개. 인간만의 본질. 이데아가 존재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통합한 본질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나무. 개. 인간의 이데아 역시도 유일한 이데아의 또 다른 시뮬라크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모든 것의 본질들은 하나의 통합본질의 시뮬라크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다양한 형태로 존재 하는가? 그것이 시뮬라크르의 핵심으로 생각되어진다. 무엇이든지 본질을 정확히 파악 할 수가 없다. 단지 각각의 상황 그리고 입장에 따라 추구하고, 생각하고, 형성하고자 하는 본질의 차이가 생기므로 각기 다른 시뮬라크르가 생기는 것 이다. 그래서 비슷한 환경과 상황, 입장의 개체들은 비슷한 이데아를 추구하게 되고, 그 비슷한 이데아의 완벽한 형태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비슷한 개체들은 집단을 형성하게 되고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또 같은 방향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 생기는 것으로 볼 수있다. 하지만 같은 종들 역시 각자의 추구하는 이데아의 차이가 발생한다. 비슷한 형태를 취하지만 각각의 개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양한 형태의 본질 비스므리 하는 것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각각이 형성한 이데아의 이미지 중 누구의 이데아의 이미지가 가장 본질에 가까운가에 대한 서바이벌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이유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단 아무나 서바이벌에 참가 할 수는 없다. 삶 자체가 서바이벌인 경우 모든 것은 살아내는데에 집중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병행이 가능하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하면서도 왜 본질에 다가가려 하는 것인가? 왜 시뮬라시옹이 이루어지는가?


지금 밖에 펼처진 문명들이 보이는가? 저 문명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인가? 무엇을 근거로 만들어 진 것인가? 근거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모든 것은 단지 우리가 형성한 이데아의 이미지의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태초에는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디자인이 개입하기 시작된다. 그 디자인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그러한 디자인의 디자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가능한 많은 개체의 공감을 얻어내는 특정개체가 형성한 디자인된 이데아가 반영된 것이다. 그것이 본질이 듯이 시뮬라시옹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본질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시뮬라시옹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시뮬라크르는 분명하게 보여지고 느껴지기에 오히려 실체라는 느낌을 준다. 그리하여 많은 공감을 얻은 시뮬라크르는 본질 이 가진 가치를 얻어지는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모든 시뮬라크르는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질이 없으면 시뮬라크르는 존재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어쩌면 시뮬라시옹을 하기 위하여 본질에 다가가려 하게된 것인지도 모른다. 즉. 본질의 가공을 하기 위하여 본질이라는 원석을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 좀 더 발전된 형태의 시뮬라시옹을 하기 위해서는 본질에 좀 더 근접해야지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온전한 이데아를 확인 할 수가 없다. 자신만의 생각과 시각, 관점으로만 탐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자만의 본질을 찾게 되는 것이다. 나만의 이데아를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나만의 이데아를 찾아가는 첫 번째 관문으로 생각된다. 나라는 것에 확실한 본질 나에 대한 이데아를 마주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데아를 찾기 보다는 끊임없이 나를 시뮬라시옹 하게 된다. 그렇게 형성된 시뮬라크르를 현실에 대입해보고 확인해본다. 하지만 그것이 본연의 ‘나’의 이데아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또한 우리가 그토록 찾고싶은 ‘나’의 이데아역시 본연의 이데아의 또 다른 시뮬라크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본질에 본질. 즉 모든 이데아의 통합 이데아. 혹은 모든 시뮬라크르의 통합 이데아를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나’ 에 대한 이데아조차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하지만 우리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는 분명 ‘나’ 의 이데아가 어디엔가 존재 하기에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서 그러한 ‘나’ 에 대한 온전한 본질 역시도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저마다 다르게 생각할 뿐 하나의 본질을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에 대한 탐구는 가장 쉽게 본질에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렇다고 과정 또한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한 고민과 탐구를 하는 것은 모두 본질를 찾기 위한 과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 우리는 본질을 고민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지장도 없다. 그만큼 현실세계의 시뮬라크르들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데 현실세계에서 부의 정도 라던지, 지식, 정보에 차이가 생김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많이 보유할수록 세상에 영향력을 미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먹고 사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는 것인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자신만의 본질을 형성한 자가 만든 것으로 생각하면 쉬울 것 같다. 쉽게 처음으로 집을 만든 개체가 있었을 것이다. 이 개체는 집이라는 이데아를 생각 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인 것이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집이라는 이미지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기호에 맞게 집을 생각하게 되고 만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집이라는 것에 기본적인 이미지는 결국 그 개체가 만든 것이다. 그 개체이외의 개체들은 자신만의 집을 생각하고 만들지만 결국 그가 형성한 집이 갖는 이데아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개체는 적어도 집에서 만큼은 영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집의 신이 되는 것이다. 왜냐면, 집이라는 것에 대한 이데아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집이라는 것에 대한 이데아 역시 본질에 탐구에서 이루어진 시뮬라시옹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집을 탄생 시킨 그 개체 이외에의 개체들에겐 그것이 이데아라고 생각되어 질 수 있지만 그 개체만큼은 시뮬라시옹을 했을 뿐인 것이다.


단지 다른 개체들보다 좀 더 본질을 탐구 했고 그것을 시각화 한 것인 것이다. 집에 본질은 안전과 생활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집에 본질이라기보단 모든 생명체의 본질인 것이다. 안전과 생활을 하는 것 이 그냥 본질 이었던 것이지 집이 있어야지만 안전과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개체의 완벽에 가까운 시뮬라크르는 집이라는 것의 본질을 형성 시킨 것이다. 집은 안전과 생활이 이루어져야한다. 본질을 통하여 하나의 본질을 만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시대가 말하는 창조 혹은 혁신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것이 현시대에는 돈이 되는 것이고 돈은 생존권을 확보해 준다. 본질을 통하여 본질을 만드는 것. 이것이 현시대가 말하는 가치이다. 그리고 본질을 통하여 만들어진 본질은 바뀌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는 현재 당연히 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전과 생활 그리고 현재의 집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이 집이 없어도 이루어진다면 집의 가치는 작아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을 처음으로 만든 그 개체나 현재 집을 업으로 삼고 있는 개체들은 현재 형성된 집을 이데아로 머물게 하고 싶을 것이다. 끊임없이 발전되는 이데아로 남기고 싶을 것이다. 아니 집이라는 이데아를 지키고 싶을 것이다. 그 예가 바로 현재 발전되고 있는 주거 형태를 볼 수 있다. 점점 좋아지고 있다. 애초에 본질을 뛰어 넘는 이상의 시뮬라크르가 만들어지고 있다. 집이라는 이데아를 지키기기 위함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본질의 탐구의 힘이다.


집을 예로 들었지만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문명들은 각각의 이데아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아니 이데아처럼 보이게 형성 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가치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여하다고 여기는 형태 역시도 결국 절대적이라고 말 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절대적인 본질의 시뮬라크르이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은 그것이 본질이나 진리처럼 여겨질 뿐 인 것이다. 그리하여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다. 모두가 그렇게 만들어진 이데아를 당연시 하게 된 것이다. 즉 모든 영향력은 본질을 통하여 만든 새로운 본질을 만든 자가 갖게 되는 것이다. 그 개체는 자신으로 인하여 형성된 이데아를 지키고자 할 것이다. (ex 집을 만든자는 집이라는 원형을 지키고자 할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대체되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이데아가 형성되면 그 개체가 형성한 이데아는 더 이상 이데아에 존재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아니 존재는 하겠지만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인위적으로 형성된 이데아는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모든 것의 본질의 원형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질을 관찰하고 탐구하여 어떠한 존재를 탄생시키어 그것만의 이데아를 형성하게 된다면 그 개체는 그것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생존권을 보장 받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창조주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세상을 창조시킨 신 역시도 시뮬라크르를 한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본질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신이 본 본질 역시도 그저 그 신의 관점에서의 본질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신은 우리에게는 신이지만 본질 앞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본질 앞에서 신은 그저 하나의 개체가 될 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떠한 이데아를 형성하게 되는 개체의 영향력은 그 영향권 안에 있는 개체들에게는 절대적이다. 신이 된다는 것이다. 즉 창조주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 앞에서는 창조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저 본질에 복사, 재현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는 창조, 창작, 혁신은 우리에게는 창조, 창작, 혁신이지만, 본질 앞에서는 그저 본질의 재해석 정도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본질에 다가가려 하게 되는 것이다. 본질의 탐구는 생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질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표본이라 생각되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 탐구를 통하여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고민, 생각, 사고는 모두 본질에서 오는 물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가령 직장상사에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치자. 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가?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크게 두 가지를 생각 할 수 가있다. 하나는 그 직장상사의 맘에 들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하나는 내맘에 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어떻게 본질에 대한 고민과 관련이 있는지 설명해보겠다. 우선 그 직장상사의 맘에 들게 하려는 생각이란 그를 파악해야 되는 것이다. 그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의 본질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맘에 드는 것을 탐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되는 것이다. 깊이의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 두 가지의 경우 모두 각각의 본질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자 그러면 그 각각의 본질에 대한 본질이 존재한다고 얘기 하었다. 그 말은 모든 본질의 탐구는 본질의 본질 탐구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직장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결국 직장생활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직장생활은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하게 되는 것이다. 각각의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즉 직장생활에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것은 나의 생계생활을 좀 더 윤택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직장상사의 스트레스는 삶을 살아가는데에 분명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본질의 모든 것이라고 얘기 할 수는 없지만 삶을 살아가야지만 모든 것을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직장상사와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분명히 찾아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탐구는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문제나 고민은 본질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본질이란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얘기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 일수도 있고, 일부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다. 본질의 탐구는 나에게 적용 할 수 있는 나만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소한 나에게만은 적용 할 수 있는 본질을 찾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라 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나만의 본질을 찾은 것이라 생각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방식으로 본질을 해석하게 된 것에 불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경지 역시도 아무나 이룩할 수 없는 경지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 올라서게 되면 우리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 스타일이 많은 이들의 공감과 선호를 얻게 된다면 영향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새로운 기준이 되곤 한다. 그러한 기준을 만드는 것이 경쟁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경쟁력은 영원 불멸할 수 없다. 많은 이들의 기호가 바뀌기 때문이다. 특히나 현재에 와서는 그 기호의 변화가 빨리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의 기호가 변화 한다기 보다 사람들의 기호를 변화 시킬만한 새로운 본질들의 등장이라 말할 수 있겠다.


본질의 탐구를 통한 본질의 재해석은 기호구조를 변화 시키는 힘을 가졌다고 얘기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본질을 재대로 파악하지 못하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본질을 마주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기존의 기준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의 등장에 설레이게 되고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기준이 합당한 명분을 갖추었을때의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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