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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보라 Feb 19. 2023

N잡러의 기쁨과 슬픔

나는 직업이 4개인 N잡러이다. 수익을 내는 기준으로 원고 쓰는 작가,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 과외를 전담하는 과외 선생님, 교육용 게임 기획자까지 총 네 개의 직업으로 일주일을 달리는데, 여기에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선교 팀 활동까지 포함하면 5개까지 넓혀서 볼 수 있다. 직업 개수가 개수인 만큼 하루 24시간, 그 하루의 연장선인 일주일은 일정으로 꽉 차 있다.


오전 8시 시끄러운 알람소리가 울리면 30분 정도 졸음과 사투를 벌인 끝에,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방금까지의 치열한 전투가 무색하게도, 거실로 나와 커피 머신과 컴퓨터를 켜면 아침 출근 완료다. 눈에 가득 내려온 졸음은 쫓고, 밤새 달아난 정신은 불러들이기 위해 커피를 들이켜며 SNS 메시지, 이메일함을 체크한 후, 오전 업무가 시작된다. 본격 N잡러의 첫 번째 과업, 교육용 게임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기획서 작성이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기업에서 만드는 각 교과별 교육용 게임 프로그램에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것으로 강사 겸 작가인 내 이력과 찰떡같이 궁합이 잘 맞는 일이다. 각종 교과와 참고 도서를 공부하고,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어 기획서를 작성한 후 공유 폴더에 저장하면 어느새 12시 점심시간. 직장인은 아니지만 정오가 되면 깨어있는 어느 인간이든 배가 주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성스럽게 밥을 차릴 기운도 시간도 없다. 시간도 기운도 누가 앗아간 것일까. 아침부터의 과업일까. 새벽 늦게까지 핸드폰을 놓지 않던 나 자신일까.


먹을 것을 사다 두지 않은 것, 일찍 자지 않은 것, 알람에 바로 깨지 않은 것, 지난 24시간 모든 나의 행적을 후회하며, 달걀프라이를 부쳐 먹는 것으로 대충 끼니를 때운다. 그리고 오전 업무로 한층 늙은 얼굴을 씻기고 광을 낸 후, 오후 1시 반 학원 출근 완료. 학원은 6시~8시 사이에 강의가 끝나는데, 수업이 별로 없는 날은 오후 4시에 출근하는 날도 있어서, 평균을 내면 하루 4~5시간 정도 근무하고 있다.


저녁이 되면 일대일 수업을 하는 과외 선생님 역할을 할 시간이다. 학원을 나와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다시 세 번째 출근. 3월이면 고등학생이 되는 아이에게 2시간 동안 고등 영문법 기초 강의를 한다. 이쯤 되면 목이 간다. 따끔따끔 목 울대가 아프고, 목소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하면 수업의 후반부가 다 와간다는 신호다.


저녁 10:30. 드디어 따뜻한 집으로 돌아온다. 고양이들이 반겨주면 한참을 물고 빨고 안고 밥 챙겨주고 똥오줌도 치워주면 짙은 어둠이 세상의 모든 소리까지 먹어버린 늦은 밤이다. 모두가 자는 이 밤, 조금은 울적한 기분에 취해서 원고 작업을 한다. 이따금씩 들어오는 NGO 단체의 뉴스레터 원고, 마을 생애사 책 제작 원고, 매일매일 쳐내야하는 의뢰사의 마케팅 원고 작업 등을 이 시간에 하는데 보통 새벽 2~3시쯤 마무리가 된다.


텔레비전 정규방송 프로그램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내 정규 일과가 모두 끝이 난다. 가끔 과외 수업이 없는 날, 가끔 학원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에는 주로 수익과 큰 상관이 없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거나, 소설 작법 수업을 듣곤 한다.


꽉 찬 일과로 자연스럽게 평일에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주말에는 가끔 학생 보강이 있거나 작법 수업의 과제를 한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과업에, 나 자신을 한참이나 돌보지 못하게 되면 가끔씩 마음 한편 숨어있던 작은 보라가 나와 소리를 치며 운다. 끄아아아아아아앙!


나는 어른이니까. 얼. 은. 이니까, 소리는 먹고 눈물은 삼키고 맘 속의 발광하는 작은 보라에게서 시선을 거둬버릴 때가 많다. 이렇게까지 해서 나에게 남는 것은 한 달에 여러 번 찾아오는 급여일과 브런치에 쌓인 내 콘텐츠. 그리고 컴퓨터에 저장된 시놉시스들.


작은 보라에겐 미안하지만, 내 마음속 추는 과업들이 주는 슬픔보다 기쁨에 더 기울어있지 않나 싶다.


사업이 망해버린 뒤, 빚더미에 앉은 나는 선택해야 했다. 정말 원하는 글쟁이로서의 삶은 포기하고 직장인으로서 적지만 안정적인 월급으로 빚을 갚아나가며 중앙에서 벗어나서 살 것. 혹은 가시밭 길을 신발도 신지 못한 채 헤쳐 나가며, 글쟁이의 삶도 빚 갚는 것도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살 것.


이미 잃을 것이 없는 자의 오기였을까. 결단한 적도 없지만, 어느새 삶은 후자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치열이란 단어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던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이유로 내가 만든 실수 위에서 아슬아슬 곡예를 한다. 쓰러질 듯, 떨어질 듯 한 발자국씩 나아간다. 이따금씩 박수도 받는다.


곡예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고, 입술을 꽉 깨물고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지며 이 줄의 중반까지 왔다. 부디 내 몸과 마음이 중반부를 넘어서 끝 지점에 다다를 때까지 버텨 주기를, N잡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이 밤, 내일을 버텨야 할 나를 위해 소망을 담아 기도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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