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이동권
최근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이슈가 있었다. (계속 있다)
적어도 내가 본 여론의 반응은 꽤 부정적이었다.
‘너희들 권리만 권리냐, 다른 방법도 많은데 왜 무모한 짓 하느냐?’
‘권리도, 자유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해야 하는 거다’
‘좋아지고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과격한 건 아닌 것 같다’
이외에도 셀 수도 없는 비난의 목소리가 있었다.
이동권에 대해 시위하는 장애인들의 모습과
비난하고 따끔하게 한소리 하는 사람들의 모습 앞에
생각에 잠겼다.
‘이것이 정말 이토록이나 비난받을 만한 일인 것일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비롯한 장애인들은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했을까?’
역사를 되짚어 봤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역사 속에서 일어난 자유·권리로 여겨지는 운동들 말이다.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적는 건 생략한다)
그곳에는 한 개인 혹은 집단의 이기심도 있었다.
그곳에는 다수라는 이유로 소수를 무시하는 사건도
소수라는 이유를 핑계로 과한 것을 요구하는 때도 있었다.
그곳에는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묵묵히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었고, 때론 누군가에게 큰 피해가 될 걸 알면서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도 있었다.
답을 찾으려고 본 역사 속에서 모호함만 더 얻었다.
결국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라는 식상한 결론에 도달했고,
‘그럼에도 우리는 매 순간 판단해야 한다’라는 식상한 반론을 제기했으며,
‘그럼 나는 이동권 시위에 찬성한다는’ 다소 과격한(?) 답을 결정했다.
나는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의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왜냐면 나도 출근길 똑같은 불편을 겪었고,
이미 살아오면서도 꽤 유사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겪은 ‘불편함’보다 그들이 겪는 ‘절박함’에 손을 들었다.
나는 하루 혹은 이틀 혹은 길면 한주, 한 달 정도 겪어도 너무 화가 나는 불편함을 일평생 아무리 외쳐도 비난받고 적극적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 앞에 그 삶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기에 내린 결정이고,
과격하고, 누군가에게 피해가 될 줄 알면서도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어서 내린 결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난 좋다. 공감하지 않는 것도 좋다. 관심 없는 것도 좋다.
하지만, 거기에 조금만 나와 다른,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열린 마음 한 숟가락만 넣었으면 한다.
과한 비유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과연 한국 사람 중에 독립투사를 응원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싶다.
그놈의 독립운동 때문에 가만히 있던 내 가족, 친구가 잡혀가고 억울하게 고문받고, 일제의 압박은 교묘하고 심해지기만 하고.
당시 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해가던 일본 앞에 그 독립투사들은, 운동들은 전부 부질없고 남에게 피해만 주던 행동이었을지 모른다.
조금 더 신사적이고 부드럽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나이스한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야 할까 우린.
‘일본은 명백히 잘못된 것을 했기 때문에 우린 당연히 저항한 거야! 그건 옳은 거잖아!’라고 항변할 수 있을까?
결국, 강자의 논리에 의해서 지배되고 지배받고 유지되는 것이 세계사의 흐름인데 일본이 잘못이고 우리가 옳은 것이라고 선악을 정확하게 나눌 수 있는 걸까?
또, 지금 장애인의 삶에 비장애인들이 행하고 내버려 두는 모든 것들이 과연 일본의 식민지배와 다르다고 자신 있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쉽게, 간단하게, 표면만 보고 말할 수 없다.
본디 이러한 시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마찬가지이다.
쉽게 비난하고 쉽게 지지하는 모든 것들 속에서
잠시 한 발자국 물러나 30분만 일찍 혹은 1시간만 일찍 출근길에 올라볼 수는 없을까.
그리고 그 출근길에서 쉬운 생각과 선택 대신 어려운 생각과 선택을 해줄 수는 없을까.
장애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안에 있는 다름에 대해 조금만 이해. 아니다.
판단을 유예, 보류하는 마음이 생겨나길 바라본다.
뭐, 먼저는 당연히 내가 변해야겠지만….
뭘 써도 욕먹을 것 같지만, 마음은 써 내려가야겠었어 써보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