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도스토옙스키, 미워하는 마음은 어디까지 죄가 될까

by 신세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처음부터 만만한 책은 아니죠. 두께도 그렇고, 이름값도 그렇고요. 그래서 시작하기 전부터 살짝 겁부터 나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읽다 보면 의외로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조금 불편해져요. 가족은 서로를 미워하고, 돈과 욕망은 숨김없이 충돌하고, 아무도 말리지 않은 채 이야기는 파국으로 흘러갑니다. 이게 19세기 러시아 이야기라는 게 자꾸 잊힐 정도로요.


아버지는 탐욕스럽고 천박합니다.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를 경멸하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돈과 자리는 끝까지 놓지 못합니다. 말다툼은 점점 거칠어지고, 결국 아버지는 살해됩니다. 소설은 여기서 질문을 던집니다.


범인은 누구일까요.


겉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친부 살해 사건을 다룬 추리극입니다. 법적으로 책임질 사람도 분명하죠.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질문의 방향을 살짝 틉니다. 누가 칼을 쥐었는지가 아니라, 그 칼이 내려가기를 마음속으로 허락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기 시작하거든요.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증오했고 살해를 입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손을 더럽히지는 않습니다.

이반은 직접적인 폭력과 거리를 둡니다. 대신 차가운 말로 세상을 설명하죠.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가능하다고요. 그 말은 누군가에게 허락처럼 들립니다. 스메르자코프는 그 말을 믿고 행동에 옮깁니다.


여기서 소설은 꽤 불편한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법정에 서는 사람은 따로 있지만, 책임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거죠. 죽기를 바랐던 마음도 포함됩니다. 말리지 않았던 침묵도 포함되고요. 합리화했던 이성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피를 묻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질문은 소설 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요즘 뉴스만 봐도 비슷한 장면을 자주 보게 되니까요. 누군가의 추락이 실시간으로 소비됩니다. 우리는 분노합니다. 욕하고 단죄하고,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하죠. 그 감정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조금 복잡합니다. 우리는 정의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과정을 소비합니다. 자극적인 제목을 누르고, 영상을 끝까지 보고, 댓글을 훑습니다. 어느 순간 비판과 구경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누군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마음 한쪽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낀 적은 없을까요.


이반 카라마조프가 유독 불편한 이유는 그가 악인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똑똑하고 논리적이고, 자기 손을 깨끗하게 유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직접적인 폭력을 혐오하죠. 대신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말리지도, 책임지지도 않습니다. 그 침묵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면서도요. 그는 스스로를 안전한 자리에 있다고 믿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종종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직접 해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에서 빠져나왔다고 느끼죠. 누군가 사회적으로 무너질 때 정의가 실현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몰락을 끝까지 지켜보고, 공유하고, 평가한 사람이 누구인지 다시 묻게 됩니다.


저는 사건 기사 아래 댓글을 읽다 멈칫할 때가 있습니다. 분노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런데 그 분노가 어느 순간 누군가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어요. 그때는 정의와 공격의 경계가 무너진 느낌이 듭니다. 벌을 주는 일과 파괴하는 일이 뒤섞여버리거든요.


도스토옙스키는 이 불편함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죠. 이건 자신을 끝없이 자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폭력은 언제나 남의 손에서만 시작되는 게 아니라는 인정에 가깝습니다. 방관과 냉소, 아주 작은 동조들이 쌓여 비극이 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소설이 내놓는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비난보다 책임을 택하라는 것.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자기 태도를 한 번 돌아보라는 이야기입니다. 타인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잠시 내려와서, 내가 이 장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묻는 거죠.


요즘 저는 버튼 앞에서 한 번 더 멈춥니다. 누군가를 조롱하는 댓글에는 반응하지 않고, 타인의 불행을 전시하는 화면은 조용히 닫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장면의 일부가 되지는 않겠다는 선택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지옥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책임을 나누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쌓여 만들어진 상태라고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이 침묵은 정말 중립인지.


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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