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셜리, 비참함이 악의로 변하는 순간에 대하여
《프랑켄슈타인》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머리에 나사가 박힌 채 기괴한 관절을 꺾으며 쿵쿵 걸어 다니는 초록색 피부의 괴물.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프랑켄슈타인’은 그 괴물의 이름이 아닙니다.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지적 오만에 빠져 비극적인 피조물을 만들어낸 젊은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름이죠. 정작 그 끔찍한 고통의 짐을 짊어진 피조물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름조차 갖지 못합니다. 그는 단지 ‘괴물’ 혹은 ‘악마’로 불리며 세상에서 철저히 지워진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책을 직접 펼쳐보면, 우리가 영화나 할로윈 코스튬에서 소비해 온 멍청한 괴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몹시도 지적이고, 놀라울 만큼 슬픈 존재입니다. 이 소설은 값싼 공포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처절한 질문에 가깝죠.
괴물은 처음부터 악당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갓난아이처럼 순백의 상태로 눈을 떴습니다. 기괴하게 꿰매어진 몸을 가졌지만, 숲의 새소리와 달빛의 아름다움에 감동할 줄 아는 영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동경한 그는 헛간에 숨어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인류의 역사와 문학을 읽으며 세상에 다가갈 준비를 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지는 따뜻한 손길 하나.
하지만 세상의 반응은 한결같았습니다. 경악, 비명, 혐오, 그리고 가차 없는 돌팔매질. 결정적으로 그를 절망으로 밀어 넣은 것은 창조주 빅터의 외면이었습니다. 신의 영역을 침범해 생명을 만들어놓고, 막상 그 결과가 두렵다는 이유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버린 것입니다.
철저히 버림받은 괴물은 밀턴의 《실낙원》을 읽으며 절규합니다. 지옥으로 떨어진 타락 천사 사탄에게조차 함께할 동료들이 있었는데, 자신은 이 거대한 우주에 완벽하게 혼자라고요. 그리고 마침내 창조주를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악한 건, 내가 너무 비참하기 때문이오.”
(I am malicious because I am miserable.)
이 문장은 인간의 심연을 서늘할 만큼 정확하게 꿰뚫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괴물이 아닙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참하고, 완벽하게 소외되었을 때 인간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악마가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다정함의 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한 존재에게 남는 마지막 무기는 분노와 증오뿐이니까요.
지루한 고전 문학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역시 완벽한 고립의 시간을 지나온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이 닫히고, 저라는 존재가 세계의 좌표에서 지워진 것 같았던 시기였습니다. 재능과 노력은 철저히 부정당했고, 하루를 버텨내는 것조차 버거웠죠.
어느 날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풍경이 있습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테라스 카페, 평범하고 환하게 웃으며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순간, 제 안 가장 깊은 곳에서 시커먼 감정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들의 웃음이 산산조각 났으면 좋겠다.’
‘나를 배제한 이 평온한 세계가 전부 무너졌으면 좋겠다.’
그것은 명백한 악의였습니다. 철저히 소외된 인간은 타인의 행복을 축복할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내게 허락되지 않은 온기를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누리고 있을 때, 슬픔은 너무 쉽게 혐오와 파괴의 욕망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감정에 잡아먹히는 대신, 걸음을 멈추고 제 안의 괴물을 가만히 응시했습니다. 내 안에도 이런 괴물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저는 끝내 그 괴물에게 삶의 통제권을 넘겨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끓어오르는 비참함을 질투와 분노로 탕진하는 대신, 그것을 활자로 옮겨 저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연료로 쓰기로 했습니다. 비참함이 악의가 되도록 내버려 두기에는, 제 삶의 존엄이 훨씬 더 귀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들을 대량 생산하는 거대한 공장처럼 보입니다. 뉴스와 커뮤니티의 익명성 뒤에는 ‘비참해서 악의적인’ 괴물들이 넘쳐납니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내고, 약자의 불행을 조롱하며, 누군가의 추락을 기다리는 사람들. 우리는 흔히 그들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럴 수 있냐”고요.
물론 그들의 폭력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악의가 도대체 어디에서 자라났는지, 우리는 한 번쯤 서늘한 눈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단 한 번도 환대받지 못한 절대적 고립.
아무도 나의 고통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지독한 비참함.
어쩌면 우리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처럼 그들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 놓고서, 그들이 진짜 괴물이 되어 돌아오자 그제야 비명을 지르며 돌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 괴물이 창조주에게 원했던 것은 대단한 권력도 부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고통을 들어줄 단 한 사람, 자신을 흉측한 외모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봐 줄 단 한 명의 동반자, 그리고 자신을 ‘괴물’이 아닌 고유한 이름으로 불러 줄 누군가였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괴물들을 잠재우는 방법은 횃불을 들고 사냥에 나서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짜 강함은 타인의 불행 위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겪은 비참함을 다른 사람에게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결심에서 나옵니다. 누군가가 비참함의 임계점을 넘어 악의로 무장하기 전에, 기꺼이 곁을 내어주는 것.
“당신은 괴물이 아니다.”
“당신도 이 세계의 온기를 누릴 자격이 있다.”
그렇게 말해 줄 단 한 사람이 되는 것.
괴물은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천천히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괴물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일 역시,
결국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