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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흔들린 마음 위에

by 토브


그날 카페엔 비 내음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빗방울에 씻긴 공기 사이로 갓 구운 빵 냄새가 희미하게 퍼졌고,

창문에 맺힌 물방울들은

마치 조용한 음표처럼 유리창을 장식하고 있었다.


카페 안은 말수가 줄어든 풍경이었다.

책상이 아니라 마음 위에 내리는 비 같았다.


나연은 창가에 앉아 손을 뻗어 머그잔을 감싸 쥐었다.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였지만,

그 미온이 손끝에 남겨주는 온기가

지금 자신에게 가장 적당한 위로 같았다.


노트 위에는 단 한 줄도 쓰이지 않았고,

펜촉은 종이 위에서 길을 잃은 듯 맴돌기만 했다.


그녀의 시선은 밖으로 흐르고 있었다.

젖은 골목, 서둘러 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한 노란 우산.


우산 끝에 맺힌 물방울이

툭,

툭,

떨어질 때마다

자신의 감정도 어딘가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순미는 조용히 주방에서 쿠키를 꺼내왔다.

막 식힌 통밀 쿠키는 바삭함보다 포근함이 먼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접시에 놓인 쿠키 옆에 작은 생화 한 송이를 곁들이는 그녀의 손길엔

왠지 모를 정성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달지도 않아.

대신 오늘은 마음이 들어갔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나연은

조심스럽게 쿠키를 한 입 베어물고,

오랫동안 씹었다.

달지 않은 맛이 더 오래 입안에 머물렀다.


은혜는 한참 동안 무언가를 쓰다 말고,

다시 노트를 닫았다.

펜 끝에서 흘러나오던 생각들이 멈춘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듣고 싶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방 안을 흐르는 ‘느낌’의 말 없는 언어들을.


조용히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움직이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떨림,

그 위를 스치는 빗소리.


그것들은 마치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고백처럼 들렸다.


상은은 드로잉북을 펼쳐

오래전 스케치해두었던 장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림 속의 방엔 조명이 하나,

책상이 하나,

혼자 앉은 인물이 하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녀는,

그 인물이 예전의 자신이었음을

다시금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림을 바라보는 이 자리에

조용히 함께 숨 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마음을 울렸다.


카페의 공기는 더없이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정지된 침묵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조용히 노래를 흥얼대는 듯한

부드럽고 살아있는 정적이었다.


“오늘은… 그냥,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인가 봐요.”

나연이 조용히 말했다.


은혜는 고개를 끄덕였고,

상은은 노트 대신 커피잔을 감싸쥐었다.


순미는 그런 말들 사이로

주방에서 커피를 내렸다.

그녀의 움직임은 말보다 정직했고,

그 정직함은 커피의 향기로 모두를 감쌌다.


그날, 아무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쿠키를 천천히 씹었고,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을 바라보았으며,

펜촉 대신 마음으로 기억할 문장을 가슴에 새겼다.


마치 그렇게,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음을

조용히 증명하듯.


모임이 끝나갈 무렵,

상은이 불쑥 한 마디를 꺼냈다.


“가끔은, 글 대신 마음을 옮겨놓는 날도 필요한 것 같아.

오늘처럼.”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글은

종이 위에 적히지 않았지만,

기억 속에는 또렷하게 새겨졌다.


우리는 그걸 ‘쉼표만 있는 날’이라고 불렀다.

글자가 아닌 마음으로 채워진 하루.

문장 대신 조용한 숨결과 향기로 이어진 하루.


그리고,

그 쉼표 사이사이에

우리는 여전히 함께 있다는 걸,

모두가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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