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유난히 부드럽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봄과 여름의 경계선쯤,
바람은 따뜻했고, 나뭇잎은 나직이 흔들렸다.
“우리,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고 걸어볼까?”
나연이 그렇게 말했을 때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약속은 단순했다.
‘같이 걷기. 그리고 커피 한 잔.’
그렇게 우리는 순미의 가게 문을 조용히 닫고,
가벼운 걸음을 맞췄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서로의 걸음소리에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길가에 핀 자잘한 들꽃들 사이로
나연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얘 봐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아무도 대답하진 않았지만,
네 사람 모두 동시에 그 작고 연분홍빛 꽃을 바라봤다.
그건 마치 마음 안의 작은 웃음처럼
아무런 설명 없이 다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은혜는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그 꽃을 한 장 찍었다.
그리고 메모장에 짧은 글을 남겼다.
“말하지 않아도 공유되는 순간.”
상은은 꽃잎 옆에 앉아
묘하게 휘어진 줄기를 한참 바라보다가
“얘는 일부러 굽은 척 하는 것 같아.
그럼 누군가 다정하게 눈을 맞춰줄까 봐.”
모두가 웃었다.
그녀는 어쩜 그렇게 매번 상상으로 마음을 물들이는지,
들꽃도 한 편의 시처럼 보이게 만든다.
걷다 보면 말이 생긴다.
걷지 않고 나눈 말과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들.
움직이는 몸 안에서 천천히 풀리는 감정 같은 것.
진주는 한참 조용히 걷다가 말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가게에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 얼굴이 더 예뻐 보여.”
“왜?” 나연이 물었다.
“방금 먹은 게 마음에 들었거나,
조금이라도 나아진 기분이 들었겠지.
그 얼굴이… 좋더라고.”
순미의 말은 언제나 그렇다.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따뜻한 말.
그날 우리는 바닷가까지 갔다.
해운대의 사람 많은 쪽 말고,
조금 더 안쪽 골목을 따라가야 나오는
조용한 소라해변 쪽이었다.
파도는 낮게 속삭였고,
햇빛은 물 위에서 사르르 미끄러졌다.
은혜가 가방에서 조그만 노트를 꺼냈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바람을 타고 종이가 뒤척였고,
모래가 책 모서리를 부드럽게 눌렀다.
“글을 쓰자는 건 아니에요.
그냥, 오늘 느낀 거 하나씩 적어봐요.
뭐든 좋아요. 말로 해도 되고.”
상은이 먼저 펜을 들었다.
그녀의 글씨는 조용히 시작되었다.
“나는 오늘, 누군가의 걸음 속에서 쉬었다.”
한 시간쯤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누구는 자갈을 모으고,
누구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하지만 충분히 채워진 마음으로
다시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
순미가 작은 플라워 샵 앞에서 멈췄다.
“꽃 사가자.
가게에 두면 좋을 것 같아.”
나연이 가장 먼저 웃었다.
“언니, 또 피스타치오색 포장지 고를 거죠?”
“알지? 그게 제일 예쁘다니까.”
그렇게 우리는
작은 꽃다발 하나에 네 사람의 마음을 담았다.
포장지 안쪽에서 봄이 한 번 더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게 차오른 날이었다.
손을 맞잡지도 않았지만,
마음은 나란히 걸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같은 리듬을 기억하고,
말보다 숨결로 이해하는 사이.
한 계절의 빛이 바뀌는 이 순간,
우리의 이야기는
쉼표 하나를 지나
다음 장으로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