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다시, 나로 돌아오는 법

프롤로그_ 많은 기억이 좋았다. 너무 슬플 것 같을 만큼

by 후우





8년 반,

매일 아침 네 목소리와 너의 메시지에 눈을 떴지만, 오늘부턴 혼자였다.

남은 건 눈을 뜨자마자 떠오르던 끊임없는 너의 생각과 더 이상 울리지 않는, 묵직한 휴대전화 한 대뿐이었다.


우리가 끝난 뒤 첫날.

그래, 여느 이별과 다름없었다. 다만 우리는 다를 줄 알았던 이별이었을 뿐.

말로만 듣던 그 ‘텅 빔’이 정말 오더라. 눈물이 주르륵 흘렀고, 마음은 망연했다.


이게 정말 끝일까. 우리의 모든 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도 되는 걸까.

머릿속에서는 내가 잘못한 일만 한없이 떠올랐다.

네가 했던 말들을 곱씹고, 내가 건넸던 말들을 후회하며, 수많은 질문과 해답 없는 의문들이 내 마음을 두서없이 헤집어 놓았다.


그때 가장 쉬운 방법은 ‘나’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더는 싸우거나 말할 수 있는 너는 없으니까.

1순위였던 너를 탓하는 것보다, 어느새 뒷전이던 나를 탓하는 게 더 익숙하고 덜 아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제일 가까운 타깃으로 삼아, 끊임없이 자책하고 깎아내렸다.

그 일은 이상할 만큼 익숙했고,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나는 고요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날의 나는, 끝을 받아들이기보다 나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손쉽게.



아마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던 건, 그리고 그 무너짐이 그토록 아팠던 건,

아마, 이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긴 시간의 무게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8년 반.

그 시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한 사람과 계절을 여덟 번도 더 바꿔낸 시간,

그리고 내 20대 전부를 담고 있던 시간.

사랑은 습관이 되었고, 그 사람은 내 일부가 되었다.

매일 눈을 뜨면 인사를 주고받고, 자기 전엔 사랑을 속삭이고, 만나면 맛있는 걸 먹으러 가고.

시답잖은 대화도 끊이지 않았고, 매일 연락해 왔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니 익숙함도, 편안함도 늘어났다.


처음처럼 숨 고를 틈 없이 설레진 않았지만, 나는 그 평온함이 우리 관계의 성숙이라고 믿었다.

매일 설레면 부정맥이지, 장난처럼 웃으며 우리는 익숙함을 사랑이라 불렀다.

그러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많은 것을 줄였다.


당연했던 하루 인사, 익숙했던 손길, 사소한 관심들…

그런 것들을 미루고 지나치며 우리는 '괜찮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서로를 잘 알고 오래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럼에도 우리는 다르다'라고 믿고 싶었다.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반복하며 우리는 성장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건 믿음이 아니라 버팀이었다.


안정을 가장한 무감각이 우리를 덮었고, 서로의 기분을 맞추느라 내 감정은 점점 희미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관계의 침잠이었다.

아무 일 아닌 것들을 넘기고 넘기다 보니,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네 곁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다시 잡아보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 애씀조차 너에겐 닿지 않게 되었다.

결국 끝을 보고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무너짐 속에서야 비로소 나를 마주하게 됐다.



오래도록 사랑하고, 오래도록 외면했던, 긴 연애의 끝에서 무너진 나를 다시 세우기 위해.

흐려진 나 자신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다시 시작하기 위해.

그래서 쓰기로 했다.

이건 나를 잃지 않기 위한 기록이자,

다시 나로 돌아가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작은 연습이다.


그 사람을 놓아준 건 분명 나였지만, 정작 나는 나를 놓아버린 채 무너져 있었다.

그 무너진 마음 위에 조용히 앉아, 나는 묻고 또 묻는다.

정말 괜찮은 걸까.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걸까.

나는 다시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까지 버텼을까.

그 수많은 질문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문장으로 나를 붙잡는다.


쓰는 동안에도 흔들리고, 가끔은 쓰다 말고 울기도 했다.

그렇지만 멈추지 않기로 했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그때 멈춰있던 나와 가장 솔직한 내가 마주 앉아, 함께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써도 괜찮을까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의 글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낯선 문장에 기대어 울었던 그 밤들을 떠올리면—

이 마음도, 이 아픔도 결국은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단 걸 안다.


글을 쓰며 텅 비었던 내 마음의 여백을 채워가듯,

이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의 작은 여백에 잠시 머물 수 있다면 좋겠다.

당장 위로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내 이야기를 따라 읽다가 ‘나도 그랬어’ 하고 혼잣말할 수 있다면.

그럼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건, 다시 나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의 여정이기도 하기를—.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마, 연애의 설렘의 시작부터 이별의 끝, 그리고 그 후까지. 그렇게 써 내려가는 게 좋겠지.


이제, 사랑하던 그 봄으로, 아직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에게로 돌아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