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 내가 사랑에 빠졌구나

천천히 사랑에 빠졌고, 끝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by 후우





사랑은 늘 운명처럼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의 시작은 딱히 특별하진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별거 없던 시작이 내 인생을 가장 무겁게 만든 감정이 되어버렸다


21살의 봄.

처음엔 친구였다. 같이 웃고 떠들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렀고, 연락이 끊기면 어쩐지 허전했다.

네가 군대에 있을 땐 매일 전화하던 걸 기다리는 게 내 하루의 루틴이 됐고, 전역 후 자연스럽게 연인이 됐다.

사랑이라기보단, 그냥 좋고 편해서.

뭐, 처음부터 깊은 사랑으로 시작하는 어린 커플이 얼마나 되겠나ㅡ


뭔가 특별한 감정이나 사건이 있어야 시작되는 줄 알았지만, 우리 사이엔 그런 ‘드라마’ 같은 장면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좋으니까. 그게 시작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사랑을 아주 거창하고 무거운 감정으로만 여겼다.

그래서 연인이 된 후에도 ‘사랑해’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제대로 된 연애는 처음이었고, 그 감정을 감히 '사랑'이라 불러도 될지 확신이 없었다.

그땐 몰랐다.


그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감인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고, 말투가 귀에 맴돌고, 하루 끝엔 네 얼굴이 떠오르는 날들이 이어졌다.

연락을 귀찮아하던 내가 어느샌가 네 연락을 기다리는 게 습관처럼 당연해졌고, 내가 중심이던 나는 너 없는 하루는 뭔가 빠진 느낌이었다.


어느 날, 그냥 그런 순간이 있었다.

같이 밥을 먹고, 웃고,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가, 네가 웃는 걸 봤다.

오글거린다고 로맨스 드라마조차 못 보던 내가

그 순간 문득, 네가 너무 귀엽다고 느꼈다.

가슴이 한쪽이 알 수 없이 간질간질했다.

그땐 알았다.


아, 나 이 사람… 사랑하고 있구나.


대단한 날도, 특별한 사건도 아니었지만—


그저 마음이 먼저 알아차렸다.


연인이 된 후의 날들 속엔, 정말 사소한 순간들조차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참 웃다가 문득 마주친 눈빛, 별것 아닌 말에도 함께 배꼽 빠지게 웃던 순간들.

아무 말 없이도 서로의 기분을 알아채던 그때의 공기.

우리는 누가 어떤 걸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너무도 당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 서로를 챙겼다.

그땐 그 모든 순간이 영원할 것 같았다.



아마 네가 뭐가 좋았냐고 물으면 나는 끝도 없이 말할 수 있었을 거다.

나보다 두 살 많았지만, 항상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줬던 너.

말도 조곤조곤, 웃음도 조용하고 따뜻해서 듣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른 사람 부탁은 거절 못 하고, 누구든지 친절하던 너의 선함.

내가 욱해서 삐치고 투정 부리면 당황하면서도 끝내 풀어주던 너의 섬세함.

무언가 일이 틀어졌을 때, 조용히 맞추려던 너의 상냥함.


내가 가지고 있지 않던 성격들이라 더 눈이 갔고, 그래서 더 마음이 깊어졌던 것 같다.

나는 항상 자기주장이 강했고, 원하는 건 직접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나와는 정반대의 너는, 처음엔 불편하다가도 결국엔 편안함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자꾸 마음을 주고, 주는 게 익숙해졌다.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고, 너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다.

사랑할 때 내가 감당하며 좋게 보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고 지금 와서야 가장 날 아프게 할 줄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할 땐 따뜻해 보였던 너의 ‘다정함’이

헤어질 즈음엔 왜 그토록 ‘우유부단’하게만 느껴졌는지.

모두에게 친절한 너의 ‘선함’이

왜 마지막엔 나를 가장 멀리 밀어내는 이유가 되었는지.

조용히 맞춰주던 너의 ‘상냥함’이

어떻게 우리의 대화를 회피하고 단절로 이어졌는지.


나도 달라졌다.

처음엔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고, 원하는 걸 말하던 내가

너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억지로 바꾸려고 노력하던 내가

너에게 맞춰보겠다고 조심스러워졌고,

배려라는 이름으로 점점 나를 숨기기 시작했다.

불편할까 봐 말을 아끼고, 갈등을 피하려고 나를 눌렀다.


그렇게 조용히 나를 누르다 보니, 결국 내가 나 같지 않아 졌다.


뭐. 흔한 이야기다.

결국, 내가 사랑했던 그 모습들은

나중엔 가장 견디기 힘든 단점이 되었고,

내가 한없이 감싸 안던 것들은

어느새 내가 혼자 견뎌야만 하는 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때는 미처 알 수 없던 마음들이었다.

뒤늦게야 알게 된 것들이 많았고, 이제야 비로소 이해되는 마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건, 시작만큼은 기필코 사랑이었다.


서툴고 조심스러웠지만, 우리는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고, 함께 웃던 날들이 있었다.

돌아보면 웃음 짓게 되는 장면들도 있고,

그 안에 머물던 마음은 여전히 따뜻하다.

좋았던 날들도 많았고, 그건 부정할 수 없다.


그저 서로의 방식이 달랐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아프고, 그립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잔상처럼 스며드는 기억들이 되었을 뿐.


그래서 이건 끝에서 돌아본 회고이고,


그저, 사랑으로 시작된 이야기의 첫 장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열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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