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있을 땐 어른일 필요가 없었다
세상은 늘 어른스럽기를 요구했다.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절제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나는 그걸, 꽤 잘하는 편이었다.
사실 어른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지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너랑 있을 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철들기를 미뤄둘 수 있었고,
유치해도 웃을 수 있었으며,
감정을 꾸미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쩌면 우리는 몸만 커버린
철들기를 잠시 유예한 아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나를 어린아이처럼 만들어줬다.
기억나는 건 사소한 순간들이다.
코로나 이전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퇴원 안 시켜준다고 투덜대던 나에게
넌 손을 꼭 잡고 말했다.
"피시방 갈까?"
조금 늦은 밤, 휠체어를 타고 나간 우리만의 탈출극.
학교를 몰래 빠져나온 아이들처럼 킥킥거리며 웃던 그 순간.
성인이 된 후 입원이 잦았던 나는 병원 음식에 질려 있었고,
넌 퇴근 후 두 시간을 달려와 맛있는 걸 사 왔다.
“아픈데 먹는 것까지 서러우면 안 되지.”
식사 시간이 지난 병원, 음식 냄새가 퍼질까 걱정돼
계단 한구석에 나란히 앉아 조심스레 나눠 먹던 맛.
그 맛이 지금도 생생하다.
종종 자리에 없어 혼나곤 했는데,
의젓해져야 할 나이에 우리는 그렇게 철없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의젓함이 아니라,
함께 있음이었다.
밤엔 자주 게임을 질릴 때까지 했다.
졌다고 삐지고, 이겼다고 좋아하며
화면 속 세상에서 우린 마냥 아이였다.
해야 할 일, 걱정, 미래 같은 건 잠시 접어두고
늦은 새벽, 잠드는 순간까지도 아쉬워하던 날들이 많았다.
친구들과 길을 건널 때,
파란불이 깜빡이면 너와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맞잡은 채 냅다 달렸다.
건너편에서 숨을 몰아쉬며 깔깔 웃던 우리.
친구가 보고 싶다 하면 망설임 없이 차에 올라 납치(?)하러 갔고,
맛있는 걸 함께 해 먹으며 밤새 웃었다.
즉흥적인 우리만의 코드가 참 잘 맞았다.
누가 보면 애들 같다고 했겠지만
그 모든 게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그 자유로움과 리듬은 오직 우리만 이해할 수 있는 거였다.
뒤돌아 있을 때 이름을 부르고,
볼을 찌르며 장난치고,
심심하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
네 이름의 울림이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부르고 싶은 마음이었던 걸까.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왜 부르냐고 하면
'그냥', '심심해서',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 '사랑하니까'
별 시답잖은 이유를 대곤 히히 웃었다.
너도 나중엔 "또 심심해서 부른 거지?" 하며 내 패턴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도 짜증 한 번 없이 항상 대답해 준 너,
언제나 고마웠다.
비눗방울을 보면 참지 못하고 사서 놀이터로 향했고,
신나는 노래가 들리면 내 소심댄스 타임이 시작됐다.
넌 옆에서 손뼉 치며 웃어주었다.
유치한 가사로 노래를 만들면
“작곡가야? 아 최고다!” 하며 호들갑을 떨어줬고,
나는 그 반응이 좋아서 또 다른 노래를 불렀다.
그런 네가 좋았다.
내가 시무룩하면 어느새 달달한 걸 입에 넣어줬다.
아기새처럼 받아먹던 나를 보며 너도 따라 웃었다.
내가 주는 건 뭐든 먹었고,
나는 그런 네가 귀여워서 더 많이 먹여주고 싶었다.
"밥 줘~ 배고파아~" 하며 바닥에 뒹굴고,
네가 해준 음식이 최고라고 칭찬하면 눈이 반짝였던 너.
장거리라 자주 못 만나다 보니,
만날 땐 꼭 보자마자 와다다 달려가 점프해서 안겼다.
어딜 가든 손을 꼭 잡고 다녔고,
잠들 때도 품에 안겨 잤다.
내가 어린아이처럼 군만큼 너도 아이처럼 행동했다.
이유를 알려주지 않고 서운하다 하기도 하고,
모아둔 포켓몬 스티커를 보여주며 뿌듯해하거나,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투정을 부렸다.
우리는 어른의 시간을 살면서, 틈틈이 아이의 감정으로 서로를 채웠다.
작고 사소한 모든 순간이 사랑이었다.
넌 내 감정의 날것을 받아주는 사람이었고,
“질투 나, 화나”그 말에도
“귀엽다.”라며 꼭 안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진심으로 철이 없었다.
아니, 철이 없을 수 있는 사이였고,
사실 단순히 철이 없는 게 아니라,
그게 우리만의 언어이자 세계였다.
서툴지만 진심이었고, 장난이었지만 따뜻함이었으니까.
사랑은 세상이 요구하는 어른스러움 따위는
잠시 잊게 해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유치해도 괜찮고,
감정을 꾸미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아무 이유 없이 행복한 어린아이가 되어도 괜찮다는 걸.
헤어지고 나서야 정확히 알게 되었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많은 걸 배웠다.
진심은 변하지 않되,
표현하는 방식을 더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철없는 마음과 성숙한 행동이 함께 갈 수 있다는 것.
사랑한다는 건 상대방 앞에서 가장 솔직한 나를 꺼내 보이는 용기라는 것.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 시간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감정에 꾸밈없고,
어떤 말을 내뱉어도 사랑받을 수 있었던 나.
철들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괜찮았던 우리.
세상에서 가장 진솔한 사랑을 했던 거니까.
철들지 않아도 괜찮았던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아꼈고, 사랑했다는 걸.
그래서 그 시절이 더 재밌었고, 조금은 그립고, 눈부시게 남는다.
너와 함께한 모든 철없던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때도,
그 마음은 여전히 유효할 테니까.
철없던 모습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던
그 안전함이 지금은 없지만,
그래도 다짐한다.
어떤 사랑을 하든,
다시 누군가를 마음에 담게 되든,
그 마음만은 철들지 않을 거라고.
진심은 숨기지 않고,
좋아하는 마음은 예쁘게 표현할 거라고.
솔직하되 따뜻하게.
상대를 향한 순수한 마음과 나 자신을 돌보는 지혜,
둘 다 놓지 않을 거라고.
그 철없던 사랑이,
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었으니까.
철들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그저 있는 그대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그 모든 순간들이 나를 더 부드럽고,
더 따뜻하고,
더 풍성한 사람으로 만들어줬다는 것.
사랑은 그렇게 사람을 바꾸곤 한다.
더 좋은 방향으로.
그래서 믿는다.
언젠가 다시 사랑하게 될 그 순간에,
이 마음, 이 따뜻함을 고스란히 전할 수 있을 거라고.
그 철없던 사랑이 내게 가르쳐준
진심의 온도를 잃지 않을 거라고.
그때도 이렇게 마음껏 웃고, 마음껏 표현하며
더 따뜻한 사랑을 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