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났음에도, 나를 더 좋게 만들었다
"너 요즘 많이 부드러워졌다."
언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부드러워졌다고? 나는 별로 그런 걸 느끼지 못했는데.
하지만 한두 명이 아니었다.
"예전보다 많이 순해진 것 같아."
"말투가 좀 달라졌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사랑이 날 바꾸고 있구나.
사랑을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때는 그저 진부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다.
아주 조금씩, 은근하게,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연애 3년 차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꽤 다르다는 걸 인식했다.
나는 늘 앞장서 빠르게 걷고, 먼저 나서서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책임질 일은 묵묵히 감당하는 게 익숙했다.
조금 무뚝뚝하고, 말투도 강한 편이었고,
애교라곤 없었으며, 감정을 세세하게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마음이 강했고,
내 삶의 우선순위는 늘 '나'였다.
그런 내가, 너를 만나고 바뀌었다.
처음엔 나도 모르게.
너에게만은 달랐고,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 않던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귀엽게 웃고, 농담을 던지고,
어색한 애교도 따라 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고,
칭얼대면 귀엽다며 웃어주는 네 반응이 좋아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굴기도 했다.
그냥 너한테는 많은 부분 의지하려 했다.
늘 앞장서 빠르게 걷던 나는
너와 손 꼭 잡고 나란히 걷기 위해 속도를 줄였다.
보폭이 큰 너는 보폭이 작은 내가 호다닥 걷는 걸로 보였는지
일부러 천천히 걷곤 했다.
빨리 걷던 나와 보폭이 큰 너.
사실 그냥 각자의 방식으로 둬도 잘 맞았을 거다.
그래도 서로의 속도에 맞춰가려 애쓰다 보니
우리는 점점 자연스럽게 나란히 걷게 되었다.
너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여유가 생겼다.
가장 크게 바뀐 건,
아마도 감정의 부드러움일 것이다.
너는 늘 '바뀐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말투가 부드러워졌다고, 예전보다 더 따뜻해진 것 같다고.
너처럼 따뜻한 사람을 곁에 두다 보니,
나도 그렇게 변해간 것 같다.
서로를 우선으로 두거나
연락하는 방식, 반응 하나까지
우리는 점점 서로를 닮아갔다.
그게 참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했다.
나는 너를 닮아 부드러워졌는데,
너는 나를 닮아 조금 날카로워진 것 같았으니까.
변한 건 성격만이 아니었다.
취향도 달라졌다.
로맨스 영화는 정말 못 보던 나였다.
"뻔하잖아, 왜 봐?" 하며 고개를 저었는데,
네가 좋아하니까 결국 같이 보게 되더라.
어느 날 먼저 "이거 보자"고 말했고,
너는 "진짜? 같이 봐줄 거야?"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반응이 귀여워서
간질거리던 장면도 꽤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입맛.
이건 정말 웃기지만 완전히 변한 부분이다.
나는 원래 입이 짧은 편이었다.
딱 배 안 고플 정도로만 먹고,
특히 배가 더부룩하거나 무거운 느낌을 싫어해서,
딱 정량만 먹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너랑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너는 나도 몰랐던 내 입맛을 자꾸 찾아냈고,
배부른 느낌조차 좋아지게 만들었다.
오히려 배고프면 짜증이 나곤 했다.
"한 입만" 하던 내가
"이거 더 있어?"를 묻고 있었다.
같이 먹는 밥이 맛있어서였을까.
내가 싫어하고 네가 좋아하던 돈가스 짜장면 같은 음식도
8년 넘는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이제 다 좋아하게 되었다.
고기도 좋아하긴 했지만 1인분 대충 먹고 그만이었는데,
너랑 있으면 혼자 800g도 뚝딱 해치우고 있었다.
진짜 어떻게 들어가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종종 네게 물었다.
"나 너무 잘 먹어서 돼지 같지 않아?"
그럼 넌 꼭 "아니, 귀여운데?" 하고 웃었고,
그 말에 늘 안심이 되곤 했다.
물론 너도 변했다.
밥 반 공기도 겨우 먹던 네가
결국 나와 함께 N인분을 나누어 먹던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런 나는 오직 너 앞에서만 나왔다는 거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냥 '조금 잘 먹는 애' 정도.
숨김없이,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나오는 건
너랑 있을 때뿐이었다.
나는 원래 솔직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선을 중요시 여기는 성격이라 그런지
무의식 중에도 나를 꽁꽁 감추고 살았던 것 같다.
심지어 가족 앞에서도.
하지만 너 앞에서는
내 전부를 보여줄 수 있었다.
부끄러움도, 거리낌도 없이.
그게 바로 사랑이 만든 거였다.
사랑이란
서로의 색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새로운 색이 되어가는 것이다.
예쁜 색만 덧칠되진 않아서
조금 얼룩덜룩했지만 말이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데,
좋게만 변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래도 그 변화들은 참 소중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꺼내 보인
유쾌하고 귀여운 모습들.
그 순간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 변화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비록 그 사랑은 끝났고,
네 앞에서만 편하던 모습들은 더 이상 꺼낼 수 없지만,
그 덕분에 부드러워진 말투도,
넓어진 취향도,
감정에 반응하는 방식도,
모두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나를 구성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예전처럼 혼자서도 잘하지만,
이젠 누군가와 '함께'하는 법을 안다.
그 모든 것들이 내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깜짝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끝났지만, 사라지지 않는
조금 더 풍부해진 나라는 사람으로.
이런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웃고,
느긋해지고,
부드러워진 내가
나는 제법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