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거리, 사랑에 젖은 우리
이제, 같이 쓰던 우산은 없다
요즘 봄비가 참 얄밉다.
특히 주말이면 어김없이,
‘히히. 주말이니까 나가지 마~’ 장난치듯 내려댄다.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그 장면들이 떠오른다.
우산 하나 아래,
서로를 씌워주려 애쓰던 너와 나.
180 후반의 너와 150 초반의 나.
우산 하나를 함께 쓰기엔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내가 들면 아무리 높이 들어도 너의 시야를 가리고, 어느새 네 목이 니은자가 되곤 했다.
네가 들면 나는 우산 끝에 가까워 비를 온몸으로 맞았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늘 우산을 상대 쪽으로 더 기울여 들었다.
결국은 누가 들 던, 둘 다 젖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엔 각자 우산을 들었지만,
적당히 내릴 땐 일부러
하나만 들고 나서기도 했다.
함께 걷는 그 길, 그 빗소리,
젖어가는 어깨쯤은 신경 쓰지 않고
서로 꼭 붙어 걷고, 웃고, 얘기했다.
그 시절, 우리는 그렇게
한쪽이 젖는 걸 별일 아니라고 여겼다.
어쩌다 우산이 하나뿐인 날이면
굳이 또 하나 더 사지 않고
“같이 쓰면 되지 뭐.”
툭 던지듯 말하고는
자연스레 걸었다.
사실 두 개가 있어도 분명 하나만 펼쳤을 테니까.
혼자 쓰는 게 분명 더 편했을 텐데,
그땐 함께 쓰는 게 더 좋았다.
맞아, 비 하면 생각나는 그날도 있다.
연애 초, 매 금요일마다 내가 너를 보러 가던 시절.
시외버스 정류장이 도로 쪽에 있는 곳이었다.
장마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던 날,
집에서 정류장까지 뛰느라
바지 끝이 다 젖고 우산도 휘청였던 기억이 난다.
버스를 놓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뛰었고
결국 버스에 오르긴 했지만,
넌 정류장 한쪽에서 우산을 접은 채 전화로 인사했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던 너,
젖은 앞머리, 당황한 표정,
물기를 털며 웃던 얼굴.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그날 나는, 이상하게 '이 사람과 오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감정이 빗방울처럼 똑,
조용히 마음에 번졌다.
그날의 비는, 축축하기보다
네가 있어서 그런지 다정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우산이 있든 없든 손을 꼭 잡고 마구 뛰었다.
비를 맞으며 집까지 뛰던 그 순간들.
신발이 젖고, 바지가 달라붙어도
그때는 그저 좋았다.
웃으면서, 젖으면서,
함께 달리던 그 모든 시간들이
빗물 고인 물웅덩이처럼 말갛게 떠오른다.
내가 비를 좋아했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다.
빗소리는 좋았지만, 비 맞는 건 싫어했다.
늘 커다란 장우산을 들고
단 한 방울도 안 맞으려 애쓰던 내가,
너랑 있을 땐 괜찮았다.
어차피 집 가서 씻으면 되니까.
같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 비마저 낭만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이별이 성큼 다가오고 있을 음 느꼈을 즈음.
네가 내 우산 높이에 맞춰 주던 것도 사라졌다.
“조금 오니까 맞아도 돼.” 하며 먼저 가던 너.
그 뒷모습이 내색하진 못했지만,
조금 아팠던 것 같다.
‘비 맞으면 머리 빠진다’며 농담하며 따라가
우산 씌워주곤 했지만
그런 게 반복되면서
내 마음도 조금씩 젖어갔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가까이에 차가 있으면 내버려두고,
조금 먼 거리면 쫓아가 씌워주고.
언제까지고 비를 맞겠다는 사람을,
굳이 말릴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우산을 자주 잃어버렸다.
그런 나에게, 너는 참 많은 우산을 사줬다.
큰 우산을 사느라 의도치 않게 검정우산만 쓰던 나에게
네가 선물해 준 건 핫핑크, 연보라, 민트색 같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 우산들이었다.
“작으니까, 차에 안 보이면 위험하잖아.”
그 한마디에 담긴 네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우산들, 아마 열 개는 넘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잃어버리고, 고장 나고,
결국 내 알록달록했던 우산들은
지금 내 우산꽂이엔 아무것도 없다.
그 우산들이
우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네 배려들은 어느 순간 고장 나버렸고
우리는 중요하게 생각해야 했던 것들을
손쉽게 잃어버린 뒤, 다시 찾지 못한 채
결국 우리도 그렇게
서서히 사라져 갔다.
화려했던 우산들이 사라진 것처럼,
우리의 관계도 점점 색을 바랬다.
아, 맞다.
곧 장마인데 우산을 새로 사야겠다.
다시 커다란 장우산으로.
이제는 씌워줄 사람도,
같이 써줄 사람도 없으니까.
이제는 내 우산을 챙겨줄 사람이 없으니까.
다시, 한 방울도 맞기 싫어졌다.
이제는 나 하나만 생각하면 되니까.
고작 비 오는 날
우산 아래에서도
이렇게 네 생각이 나는 게
조금은 우습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이 감정도 빗물처럼 흘러가겠지.
다만,
그래도 그날들.
그 우산 아래
함께 웃고, 걷고,
젖어가던 그 순간들이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모든 젖은 어깨들 사이로,
그때는 사랑에도 젖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