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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 순 Jul 18. 2019

평범한 콩가루 집안이 되기까지

할머니를 간병하는 엄마를 바라보는 딸.


"아들은 하늘이고, 딸은 땅이야."


 입원한 할머니 점심을 챙겨주려고, 바쁜 틈을 쪼개서 오는 엄마에게 외할머니가 한 말이다. 잊을 만하면, 잊지 않겠다는 듯이 말한다. 할머니와 같은 병실을 쓰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같은 여성인 다른 할머니들도 우리 외할머니의 꿋꿋한 의지에 혀를 내두른다. "이런 딸이 세상에 어딨어요."라고 안타까운 마음에 다들 한 마디씩 거두지만 할머니에겐 헛소리에 불과하다.

 

 우리 집은 지극히 평범한 콩가루 집안이다. 입 다물고 생활을 영위하고 있노라면, 아무도 우리의 콩가루 내역을 알지 못한다. 그저 하루, 하루를 잘 살아가는 평범한 가족에 불가하다.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세상이기에 말하지 않으면 괜찮다. 마냥 콩가루 집안이라고 단정 지어버리기엔 막장 드라마에서 나오는 출생의 비밀이나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평범한 콩가루 집안이다.


 할머니는 평범한 콩가루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겉으로는 너무나 선량하고 착해 보이지만, 그게 다다. 할머니와 인연을 끊은 둘째 이모는 할머니를 이렇게 정의한다. "상처 난 부위를 사포로 긁고, 고춧가루까지 뿌리는 사람이야." 할머니가 악담도 아닌 저주를 퍼붓는 말에 어렸을 때부터 이골이 나있던 이모는 외국으로 이민을 갔고, 할머니와 연을 끊었다. 우리 엄마는 "계모도 이렇게는 안 했을걸."이라고 종종 말하고는 한다. 할머니에 대한 상처로 얼룩진 엄마와 이모들은 고모할머니 얘기로 웃음꽃을 대신 피운다.

 

 그 와중에 딸 4명과 막내아들 1명, 막내아들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겼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할머니는 90대 중반이 되셨고, 신장에 무리가 와서 소변 조절을 하실 수 없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소변줄이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퇴원하는 순간부터 옆에서 소변을 받아줄 간병인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이미 할머니 대부분의 재산을 독식한 삼촌이 틈을 놓치지 않고, 할머니의 남은 집마저 먹어치우려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집 내놓고, 요양원 보낼 거야.


 정말 소름이 돋았다. 한 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 나쁜 놈이라고 부르짖는 엄마의 목소리는 하루 종일 맴돌았다. 할머니를 위한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는 삼촌은 탐욕을 어김없이 드러내며, '간호할 테니 30만 원만 붙여달라.'는 엄마의 말을 딱 잘라 거절했다.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삼촌의 윽박은 우리 엄마를 얼마나 만만하게 보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할머니에게서 나온다는 것도.


 언제 삼촌의 회유에 넘어갈지 모르는 할머니지만, 우선은 집에 있는 것을 원하셔서 당분간 옆에서 엄마가 간호를 하게 되었다. 엄마를 못 본 지 일주일이 되어가던 차, 할머니의 병원 때문에 할머니가 엄마네 집에서 자게 되었다. 엄마의 축 쳐진 목소리가 걱정되어 막차를 타고 엄마네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간병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 실로 충격적이었다. 할머니가 소변이 나올 것 같다고 말씀하실 때마다, 엄마는 할머니의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얼른 소변통을 갖다 대었다. "조르르륵" 나오는 소변의 소리와 구수한 냄새는 나를 멘붕에 빠뜨렸다. 차마, 대놓고 보지는 못했지만 그냥 그 상황이 낯설고 싫었다.

 

 엄마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할머니가 중간에 깨우면 벌떡 일어나 소변통부터 갖다 대었다. 할머니에 대한 연민보다도, 우리 엄마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우리 엄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듬어 준 적도 없었으면서.'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그 옛날, 엄마가 내 나이 때, 자신이 번 돈으로 피아노 학원 다니는 것조차 못하게 했던 사람이 할머니인 걸 뻔히 아는 나는 눈물이 울컥울컥 차올랐다.


 할머니가 자기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엄마에게 미안함을 표현할 때마다 엄마는 걱정 말라며 항상 자기를 깨우라고 다독였다. 엄마의 얼굴형 뿐만 아니라 소심하고, 금방 상처 받는 마음까지 똑 닮은 나는, 엄마의 심정이 어떨지 더 공감이 갔다. '애증' 어쩔 수 없는 가족, '딸'이라는 이름으로 견뎌내고 있을 엄마. 할머니를 간병하는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심정을 평생 기억해야겠다.


 나는 결국 밤새 잠을 자지 못한 채, 공부를 하러 가야겠다고 5시 40분 첫차를 타고 도서관으로 갔다. 버스 안에서도 눈물이 차올라서 참느라 한참을 애썼다. 새벽 그 고요한 적막감 속에 소용돌이치는 증오심과 연민 속에서 나 역시 엄마의 삶에 크나큰 방관자였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우리 집의 일을 더 이상 묵히지 않기로 결정했다. 엄마의 엄청난 희생과 노고에 침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먼 훗날, '우리 엄마'가 자신의 삶에 회의감으로 얼룩질 때, 엄마의 삶을 알아주는 '딸' 이 있었노라를 꼭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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